약소민족의 지도자상(히11:24-26) - 민족 수난의 달 6월 -
다윗과 솔로몬이 통치하던 통일왕국시대를 제외하고는 이스라엘 민족이 역사상에서 온전한 독립국가의 주권을 제대로 행사한 날은 거의 없었습니다. 남으로는 애급과 북으로는 아수르와 바벨론, 메대-파사, 그리고 바벨론 귀한 후에는 헬라와 로마 제국의 시녀가 되어오다가, 주후 70년에는 완전히 망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그 민족이 2 천년간의 이민생활을 하면서도 민족의 주체성을 지키며 오늘까지 존재한 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창12:1-3) 하나님이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영원한 하나님의 도성을 바라 본(히11:10), 민족의 지도자들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 오늘 우리가 히브리 기자의 이 본문을 잘 이해하려면, 히브리 기자가 이 글을 쓰던 때의 역사적 배경을 살펴보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히브리서는 주후 85년에서 110년 사이에 기록되었다고 말합니다. 이 때는 이스라엘이 이미 로마제국에 멸망한 후이며, 히브리 랍비들이 주후 100년에 얌니아에 모여서 조상들의 신앙과 전통을 후세에 전해주기 위해서 구약성경 39권을 정경을 전경으로 채택하던 때입니다. 이런 시기에 히브리 기자는 방황하는 동족과 교회 지도자들에게 민족의 지도자 모세의 지도자상을 본문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넷으로 분류한다면, 첫째는 지도자의 자기 성장이요 둘째는 지도자의 자기 확립이요 셋째는 지도자의 자기 헌신이요 넷째는 지도자의 비죤입니다. I. 지도자의 성장입니다.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24절) 우선 지도자는 성장해야 할 것입니다. (1) 육체적인 성장 사도행전 7:22 절에 보면 "모세가 애급 사람의 학술을 다 배워 그 말과 행사가 능하더라."(행7:22)고 했습니다. 출 4:10-16에 따르면 모세는 자신이 '말에 능치 못한 자'라고 해서 하나님께서 아론을 그의 대변자로 지명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스데반은 모세를 애굽의 학술을 다 배워 말과 행사에 능한자라고 했습니다. 1세기 유대인 학자 필로(Philo)는 모세가 음악, 기하학, 수학, 과학, 예술 등 다방면에서 뛰어난 인물이었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모세가 자신을 '말에 능치 못한 자'라고 한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맡기신 사명을 회피하기 위한 변명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모세는 애급 왕궁에 기거하면서 지도자로서의 능력을 착실히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자신의 능력만 의지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지 않아 광야의 오랜 세월을 통해 연단받았어야만 했습니다. . (2) 도덕성의 성장 "모세는 나이 40이 될 때에, 그 형제 이스라엘 자손을 돌아볼 생각이 들었습니다” (행7:23). 그는 애급의 왕궁에 거하면서, 노예생활에 허덕이는 자기 동족을 돌아볼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했습니다. 불가능했습니다. 동족을 위한다는게 오히려 애급 사람을 처 죽이는 살인자가 되어 미디안 광야에서 망명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행7:23-29) (3) 영적 성장 "40년이 차매 천사가 시내산 광야 가시나무떨기 불꽃 가운데서 그에게 보이거늘" (행7:30). 모세의 영적 성장의 단계를 의미합니다. 교회 지도자는 반듯이 이 영적 성장의 과정을 거처야 할 것입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길이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II. 지도자의 자기 확립입니다.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히11:24) 사람이 무엇을 거절한다는 것은 자기 것이 있을 때에 가능한 것입니다. 모세는 자기가 연약의 백성이라는 주체성이 있었습니다. 중국의 한 성현은『군자는 화이부동이요 君子和而不同, 소인은 동이불화 小人同而不和』라 했습니다. 지도자(군자)는 남과 조화를 이루지만 동화되지 않고, 소인은 동화하는 것 같지만 조화를 이루지 못한다. 지도자는 자기 주체성을 유지하면서도 남과 조화를 이루고, 소인은 어디가도 잘 끼어 들지만 조화를 이루지 못한다는 뜻으로 풀이가 됩니다. 약소민족의 지도자가 된 우리들은 결코 이 미국사회에서 자신의 주체성을 상실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주체성을 가지면서도 주류사회에서 잘 조화를 이루어 나가야 할 것입니다. 모세는 성장하여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할 수 있는 지도자의 주체성이 있었습니다. 이중문화권속에서 고민하는 우리 이민자의 지도자들에 있어서 심각한 문제 중의 하나는 언어 문제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과거 히브리 랍비들이 이중 삼중의 문화권 속에서 어떻게 그들의 주체성을 보존했는가 하는 사실을 깊이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주전 250년경, 알렉산드리아에 포로가 되어간 히브리의 랍비들은 모세 5경을 후세에게 전 하기 위해서 헬라어로 된 70인경을 남겼습니다. 그들은 이중 언어를 구사하면서도, 히브리 사고로 율법을 번역했던 것입니다. 모세의 조상들이 400년간이나, 애급의 문화권 속에서 살아 왔지만,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받을 때에 그는 분명 히브리 말로 받았다는 사실을 볼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얼마나 조상의 전통과 문화를 잘 보존해 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가지고 있는 구약의 히브리어 마소라 경은 주후 10세기를 전후해서 히브리 랍비들이 상실되어가는 히브리어 성경을 후세에 전해주기 위해서 자음으로만 된 히브리어 성경에 모음을 붙여서 누구든지 읽을 수 있도록 만든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근대에 발견된 사해사본과 거의 일치한다는 것을 보면, 그들이 얼마나 조상의 언어와 전통을 존중해 왔다는 사실을 알 잘 수 있습니다. 약소민족의 지도자는 어디를 가든지 '화이부동'해야 할 것입니다. 민족의 전통과 신앙을 보존하면서도 다른 문화를 존중하면 조화를 이루는 신념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바울의 경우를 보면, 그가 평시에는 헬라 말을 유창하게 구사했지만(행21:37) 예루살렘에서, 그를 해하려고 하는 대적들 앞에 변명할 때에 히브리 방언으로 말을 하니, 모두가 숙연해졌다고 했습니다(행21: 40; 22:1, 2). 더욱 놀라운 것은 사도행전 26:14절에 바울이 아그립바(헤롯 2세) 앞에서 변명할 때에,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가 다 땅에 엎드러지매 내가 소리를 들으니 (주께서) 히브리 방언으로 이르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모세도 바울도, 히브리 방언으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III. 자기 헌신입니다.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 보 다 더 좋아하고"(25절) 이와같이 약소민족의 지도자는 자기 백성과 함께 고난에 동참 해야 할 것입니다. 공동변역과 RSV에는 "좋아하고"를 "선택했다"고 했습니다. 잘된 번역이라고 봅니다. 세상에 고난을 좋아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모세는 고난을 선택한 것입니다. 당대의 히브리 기자의 눈에는 자신의 출세를 위해서 배교하고, 로마와 야합하는 지도자들이 꾀 많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모세는 바로의 궁전을 떠나서 노예백성과 함께 광야로 나간 것입니다. 우리 이민교회 지도자들은 자기 교회만 부흥이 된다고 만족해 할 것이 아니라, 이민교회 전체를 위해서 고통을 분담해야 되겠습니다. IV. 지도자의 비죤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급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주심을 바라봄이라"(26절). 이 구절은 현세의 물질 때문에 신령한 환상이 보이지 않는 당대의 교회 지도자들에게 던지는 경고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모세의 눈에는 신령한 환상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메시야의 나라였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 그것은 메시야가 다스리는 인류의 영원한 평화의 나라 건설을 위한 고난이었습니다. . 초대교회의 순교자들에게도 그와 같은 환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스테반은 순교할 때에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행7:56; 계21:1)고 했습니다. 모세는 비스가 산정에서 눈에 빤히 보이는 가나안 땅에는 이르지 못했어도, 저 멀리 보이는 하늘의 도성을 바라본 것입니다. 히브리 기자는 그것을 "더 나은 본향"(히 11:16)이라고 했습니다. 이제 온 세계에 흩어진 약소민족의 지도자들은 지상의 가나안에는 이르지 못했다 하더라도, '저 멀리 뵈는 시온성‘을 향해서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의 광야 길을 멈추지 말아야 할 것이며, 특히 625 사변 63주년을 마지하여 지금도 고난의 길에서 허덕이는 북한의 지하교회와 선량한 동족의 구원을 위하여, 그리고 우리 조국을 위하여, 모세의 헌신을 본받는 우리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의 말씀>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주심을 바라봄이라 (히11:24-26) 샬롬 2013/6/16 주일아침 백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