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옥에 간 어느 부자 이야기 - 사순절의 명상 (눅16:19-31) -
본문에 나타난 지옥에 간 부자는 아브라함을 '아버지'(24절,27절, 30절)라고 부른 것을 보면 그는 유대교 교인이었고, 할례도 받았고, 안식일이면 회당 (교회)에 가서 예배도 드린 교인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그가 왜 지옥에 갔을까? 유대인의 전통에 따르면, 하늘 나라에 가서 상받을 세 가지 덕목이 있는데 금식과 기도와 구제라고 했습니다. 아마도 이 부자는 세상 사는 동안에 이 중 어느 한 가지도 제대로 이행한 일이 없었고, 오직 자기 자신만을 위해서 값 비싼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즐겁고 호화로운 생활을 하고, 나사로라 이름한 거지가 온 몸에 헌데를 앓으며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로 주린 배를 채우려고 하는데, 이 부자는 구제해야 할 대상에 대해서 전혀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이 비유의 대상이 앞뒤의 문맥을 살펴 보면, 돈을 좋아하는 당대의 종교지도자인 바리세인들이었다는 사실입니다(눅16:14). 따라서 이 비유는 오늘날 저를 포함한 교회 지도자들이 깊이 반성해야 할 말씀이라고 생각됩니다. 여기서 우리가 몇 가지 생각해 볼수 있는 것은: (1) 이 비유 중에 거지 나사로의 이름은 있으나, 부자의 이름이 없습니다. 아마도 이 같은 부자는 하늘 나라 생명책에 기록될 수 없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 같습니다.(계3:5;13:8; 17:8; 20:12; 20:15;21:21 참조) '나사로'(히브리 말 '엘르아살'의 헬라 말 음역)는 '하나님은 도움이시라'는 뜻으로 인간의 따뜻한 도움은 받지 못했어도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죽어서 하늘나라의 아브라함의 품에 안기게 되었고, 이 같은 무정한 부자는 하늘 나라의 생명책에 이름이 올라가지 못한 다는 것을 시사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2)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은 굉장히 비싼 옷입니다. 당시의 노동자의 샤일하루의 임금이 9페니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부자가 입은 옷 값은 약 30에서 40 파운드가 된다고 합니다. 1 파운드는 240 페니이니까, 그 부자가 입고 있는 옷 값은 노동자 만5천명 분의 일당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 부자는 하로 이틀도 아닌 “날마다”그렇게 호화로이 연락을 한 것입니다. 이런 부자는 회개하지 않는 한, 결코 천국에 들어 갈수 없다는 것을 주님께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 3. 이 부자는 지옥에 가서도 자기 중심주의를 버리지 못했습니다. (1) 지금은 사정이 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과거에 세상에서 살 때에 자기 집에서 빌어먹던 나사로의 얼굴을 알아보고 그 이름을 부르면서 자기 심부름을 좀 시켜 달라고 아브라함에게 부탁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세상 살 때에 나사로를 위해서 아무 것도 해 준 일이 없는데, 이제 와서 무슨 염치로 나사로를 부려먹겠다는 것인지, 지옥으로 떨어지는 사람의 심보를 단적으로 잘 묘사한 장면으로 볼 수 있습니다. (2) 이 부자는 아브라함의 말씀조차 꺾어보려고 자기 주장을 내 세우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말은 틀린 것이고, 자기의 주장이 옳다는 것입니다. 부자가 지옥의 고통을 겪으면서 아브라함에게 구합니다. "아버지여,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저희에게 증거하게 하여 저희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라고 말합니다. 아브라함이 말합니다. "저희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고. 그 때에 부자가 다시 말합니다. "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저희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고. 이 때에 주님은 분명히 말씀합니다.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 하리라"(눅16:30,31)고. "즉 가난한 자들을 돌보아야 할 의무를 끊임없이 강조한 모세와 선지자들을 믿지 않는다면 설령 죽었다 살아난 자가 천국과 지옥의 이야기를 해준다고 해도 그들은 그것을 거짓으로 단정해 버리고 말것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이기적인 삶의 방식은 그 완악한 심령 가운데 이미 굳어져 버렸기 때문입니다.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 가운데 들어있는 아이러니 (irony)를 주목해 보면, 예수는 그가 죽음에서 다시 일어났을 때조차도 예루살렘의 대부분의 종교 지도자들이 이를 믿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확실히 알고 계셨다는 시실입니다. 여기 '들을지니라'(원어:'아쿠오')하는 것은 단순히 귀로 듣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깨닫고 이해하는 것, 더 나아가서는 들은 바대로 순종하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 말에도 말 잘 듣지 않는 아이들을 꾸짖을 때 "너 왜 그렇게 말을 듣지 않냐?!"고 하는 것 처럼 그것은 말씀을 손종하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오늘도 모세와 선지자들의 외치는 음성을 바로 들을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못하면 이 부자와 같이 부귀와 영화를 누리는 것은 오히려 큰 화가 될 것입니다. 따라서 “나사로”라는 이름이 시사해 주듯이 “하나님이 나의 도우심이라”는 마지막 소망을 잃지 말고 이 세상의 최악의 고난도 극복할 수 있는 믿음을 우리 모두 가질 수 있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지금은 사순절입니다. 우리는 참회하는 뜻으로 금식도 하고, 자기 나름대로 어떤 육신의 쾌락을 절제하며, 가난한 이웃을 위해서 구제하고 자선을 행하며, 영원한 생명을 우리에게 약속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절을 맞이할 준비를 해야 할 것입니다. . 샬롬! 2013년 2월17일 주일아침 백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