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의 소명 - 백호의 여로 - (13)
대학울 졸업하고, 아무 것도 가진 것 없는 놈이 사랑 하나를 밑천삼아 장가도 들고, 운명처럼 생각해오던 신학교에도 입학을 했다. 그 때에 신학교에 갈만한 형편이 되어서 간 것이 아니고, 나의 형편을 잘 알고 계신 숭대의 현수길 교무주임께서 내가 신학교에 가면 미국 피얼스 제단에서 장학금을 얻어보겠다는 언급이 있어서 그걸 믿고 학기를 놓치지 않으려고 장학금이 나오기 전에 이자 돈을 얻어서 신학교에 등록을 했다. 하지만 몇 달이 흘러도 기다리던 장학금이 나오지 않아, 할 수 없이 전세방을 빼어 이자 돈을 갚고 콧구멍만한 삭월세 방에서 구차한 신혼생활이 계속되었다. 주일이면 미아리 미암교회 주일학교 전도사로 근무하면서 쥐꼬리만한 사례금을 받아왔으나, 그것이 생활비에는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먹을 양식이 떨어지면 처가집에서 얻어다 먹기도 했지만, 한 학기동안 점심은 먹어 본 일이 거의 없었다. 점심 시간에 친구들이 도시락을 펴고 즐겁게 식사를 하는 시간에 나는 슬그머니 자리를 피해서 냉수를 마시면서 허기를 달랬다. 이런 고달픈 신학교를 근근이 한 학기를 마쳤다(1959년 1학기). 성경에 보면 약속의 땅에도(창12:7), 기근이 들어(창12:10), 아브라함이 애급으로 내려가 큰 시험을 겪었듯이 지난 날 그렇게도 나의 가는 길에 빛이 되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잊어버리고, 잠시 겪은 기근의 시험에 빠져 신학을 포기하고 세상 길로 나가 돈을 벌어보려고 안간 힘을 쓰고 있었다. 그때에 내가 옛날 처럼 기도하고, 선배 목사님들을 만나 상당하고 지도를 받았더라면, 하나님께서 분명 내 길을 인도해 주셨을 것인데, 그때에 나는 전혀 그러지를 못했다. 큰 시험의 빠젔던 것이다. 아무리 애써도 별 길은 보이지 않고, 하도 답답해서, 아내와 생후 7 개월된 큰놈을 데리고 잠시 어머님이 살고 계신 부산으로 내려갔다. 거기서 어떤 생업을 구할 수 있을까 싶어서였다. 지난날 내가 어떤 어려운 시련을 다 겪었다 해도. 회고해 보면, 그때가 내 생애에 있어서 가장 참담한 때였던 것 같다. 부산으로 내려간 다음 주일, 설교시간에 목사님의 설교가 왜 그렇게 귀에 거슬리던지, 내 맘에 하나님에 대한 반항심이 생겼던 것이다. 속으로 혼자 중얼거렸다. "저 말씀은 다 거짓이다. 하나님은 살아계시는 것 같지 않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어째서 나로 하여금 이렇게 비참한 지경에 까지 처하도록 하신다는 말인가!” 원 세상에 마귀의 시험이 아니고서야, 어찌 내가 이런 망령된 말을 할 수 있다는 말인가! 아마도 내 생애에 있어서 이런 말을 해 본 것은 이것이 처음이요 마지막이기도 했다. 그런데, 하나님은 나의 이와 같은 배신적인 행위를 그대로 보고만 계시지 않았다. 그날 오후에 나는 울적한 마음에 어느 극장에 갔다. 극장 갈 돈은 어디서 났던지..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다. 집에 돌아오니, 아이가 침대에서 굴러 떨어져서 한참 동안 숨을 쉬지 못했다는 것이다. 나는 그때에 무언가 깨달아야 했었는데, 별 느낌 없이 그날 밤을 지냈다. 그런데 다음날 다시 한번 그런 일이 발생했다. 아내가 아이를 어제 떨어졌던 그 침대에 올려 놓고 날보고 잘 돌보라고 했는데, 내가 무엇에 열중하고 있는 동안, 그놈이 다시 그 자리에서 굴러 떨어지더니 머리를 심히 다쳤는지, 제대로 울지도 못하고 숨도 제대로 쉬지를 못하는 것이다. 나는 그 순간 즉시 하나님께 무릎을 꿇었다. “주님, 저 아이가 저렇게 화를 당하는 것은 나의 죄 값입니다. 제가 하나님께 죄를 지었습니다. 용서하여 주세요. 저 아이를 살려 주세요.” 이렇게 기도했다. 그러나 회복되지 않았다. 당장 이웃 소아과에 데리고 갔다. 의사가 전지로 눈동자를 드려다 보는데, 눈동자가 풀어져서 움직이지를 않는다. 소아과 의사가 포기를 했다. 다시 그 동네 용하다고 하는 한의에게 침을 맞는데,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그길로 대학병원에 갔더니, 입원실에 의학도들이 대여섯명 들러서더니, 교수님이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고나서 머리를 해부해야 한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실험용으로 사용해 보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내 마음에 “그건 할 수 없다. 이 어린 것의 머리를 해부해서 뭘 어찌하겠는가? 죽든지 살던지 하나님께 맡기고 기도할 수밖에 없다.”하고 퇴원을 했다. 이제 나는 아이를 붙들고 기도하기 시작했다. “하나님, 이 아이가 무슨 죄가 있습니까? 이 아이가 이렇게 된 것은 제 죄 값인 줄 압니다. 저를 회개시키기 위해서 이렇게 하신 것이오니 죽었던 나사로를 살리신 하나님, 이 아이를 살려주십시오. 그리하면 제가 무슨 일이 있어도 신학공부를 다시 시작하겠습니다.” 아이는 간간이 열이 오르면 발작을 하고, 조용해 졌다가 다시 발작을 했다. 그때마다 나는 “아버지, 이 아이가 가는 것 같습니다. 이 영혼을 받아주십시오. 그러나 하나님 살려주십시오.” 이렇게 간절히 기도하는 중, 아이가 또 다시 심한 발작을 하는데, 임종기도를 하듯이 간절히 기도를 하면서도,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하나님, 살려주십시오!”라고 계속 기도를 드렸다. 그런데 갑자기 아이가 조용해지는 것이다. "아이쿠! 이제 이 아이가 정말 가는 가보다" 했는데, 얼굴을 가만히 드려다 보니 눈을 감고 새근새근 잠이든 것이다. 온 종일 잠을 자더니, 갑짜기 “으악!”하는 소리와 함께 아이가 울기를 시작했다. 이렇게 살아난 아이가 지금 나와 함께 목회의 생애를 함께 걸어온 우리 큰놈이다. 아이가 살아나자, 나는 서울에 계신 선배목사님(고원용 목사)에게 사정을 말씀드리고 다시 신학공부를 할 수 있는 길을 열어달라고 편지를 보냈다. 며칠후에 답장이 왔다. 거기에 일생동안 잊지 못할 귀한 말씀이 적혀 있었다 .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습니다."(히 11:8). "무조건 올라오세요. 뒷일은 주님께서 인도하실 것입니다." 나는 이 말씀을 따라 상경했을 때에 선배목사님은 자기가 시무하는 동원교회 학생회 지도를 맡겨주시고, 무궁화 유지회사의 사모님이신 차진정 권사님을 통해서 장학금도 마련해 주셔서, 신학교 휴학 1 년 만에 다시 공부를 계속할 수 있었다. 이렇게 내가 세상길로 빠질번 했을 때에 주님은 큰놈을 희생의 제물을 삼아 나를 주님의 길로 다시 돌아오게 하신 것이다. 이것을 나는 내 생애의 제 2의 소명이라고 고백한다. 이렇게 살아난 큰놈은 뇌에 손상을 입어서 그런지 공부에는 지장이 많았지만, 음악에는 뛰어난 소질을 타고나서 아내가 어릴 때 피아노 공부를 시켜서, 교회 반주도 했고, 다른 어려운 교회에 반주자가 빌 때에는 가서 봉사하기도 했다. 고등학교 때에는 학교 밴드부에서 활략하면서 명랑하게 성장하였다. 그러나 그에게는 나의 죄값으로 일생동안 치유할 수 없는 상처가 남아있다. 그 아픔이 어떤 것인지, 나의 일기장에서 기록되어 있다. (1) (2001/12/12,수요일) 오늘은 큰놈 생일이다. 벌서 42살이다. 결혼생활에 실패한 후 혼자 지내는 모습이 심히 애처롭다. 게다가 왼쪽 다리가 말라 들어간다. 원인을 알 수가 없어서 더욱 마음 아프다. 생후 7개월에 침대에서 떨어져 죽다 살아난 후유증이 지금 나타나는 게 아닌지 모르겠다. 아내는 어제저녁부터 큰놈의 생일을 차리노라고 부산하다. 외롭게 살아가는 아들을 위한 모정이다. 오늘 나는 아내가 정성스럽게 마련한 음식을 큰놈의 직장 동료들과 함께 나누도록 직장에 배달했다. 어떤 때는 혼자 살아가는 모습이 안 되어 보였지만, 생존경쟁이 치열한 이 험악한 세상에서 남편 구실, 아비 구실 제대로 못할 바에는 차라리 혼자 지내는 게 피차 복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 남들이 권하는 재혼을 체념해 버렸다. 그래도 그놈을 생각하면 내 생애의 전부이기도 하다. 내가 경제문제로 신학을 중간에 포기했을 때 하나님이 그놈을 대신 치셨다. 그 때에 나는 회개하였다. “주님, 이 아이를 살려주십시오. 살려만 주시면, 제가 무슨 어려움이 있어도 신학을 다시 계속하겠습니다! 이 아이가 다친 것은 주님과의 약속을 어긴 저의 죄 값이오니, 저를 용서하시고 이 아이를 살려주십시오. 만일 이 생명을 거두어 가시면, 제가 무슨 용기로 목회를 할 수 있겠습니까? 나사로를 살려주신 주님, 이 아이를 살려주십시오.”라고 간절히 기도를 했다. 아이는 여러날 동안 아무 의식 없이 눈에 먼지만 자욱이 앉아있었다. 어느 날 마지막 숨을 거두려고 하는지 경련을 일으키면서 발악을 한다. 이제는 마지막인가보다. “주님 이 애가 정녕 가야 합니까? 간다면 그 영혼을 주님의 품에 안아 주십시오. 그러나 주님, 한번만 살려주십시오, 주님 살려 주십시오” 라고 기도했다. 그런데 아이가 조용히 눈을 감고 잠을 자기 시작한다. 나는 그렇게 하다가 가는 줄만 알았다. 그러더니 얼마 후에 갑자기 “으악!”하는 소리와 함께 울음을 터트렸다. 살아난 것이다. 아내가 젖을 물렸더니 열씸히 빨아댄다. 나는 그 후 만난을 극복하고, 가난과 싸우면서 신학을 계속했다. 그래서 그 아이 별명이 나사로다. 이렇게 해서 나사로의 고난이 오늘까지 나의 생애를 이끌어가고 있다. 어느날의 일기(2)(2002/8/2, 목요일) 나는 오늘도 큰놈과 함께 탬파에서 잭슨빌까지 왕복 400 mile의 미니 트럭을 운전했다. 둘째놈은 공부도 많이 해서 UCLA에서 학위를 받아(Ph.D) 한국에 나가 대학교수를 하지만, 그놈은 지들 사느라고 부모를 잊고 살지만, 큰놈은 어릴 때 입은 상처로 전문직에는 종사를 못하고, 누이동생 회사에서 트럭을 운전하고, 막일을 하지만, 그놈이 늘 부모 곁에서 효도를 한다. 못난 나무가 산을 지킨다는 말이 꼭 맞는 것 같다. 그런데 요즘 큰놈이 운전을 하다가 가끔 조는 것을 아내가 알고 난 후부터 먼 길을 떠날 때는 내가 옆에 앉기로 했다. 그놈이 웬만하면 아비에게 핸들을 안 넘기지만, 오늘도 떠나면서 "얘야, 졸리면 아버지한태 말해라" 했더니, 오늘은 돌아오는 길에 내가 운전대를 잡았다. 곁에서 곤히 잠든 모습을 보니, 생후 7개월에 사경을 헤맬 때 내가 울면서 기도하던 그 모습이 다시 한번 떠 올랐다. 아비가 변변치 못해서 어느 자식에게도 금전적으로 어떤 도움도 주지 못한 것이 늘 맘이 아프지만, 아비 때문에 자식이 쇠고랑 차는 일이 없는 게 한편 다행이라 생각하고, 가난도 축복이라 생각하고 스스로 위로를 해 본다. 세상 사람들은 우리 큰놈을 어떤 시각으로 볼지는 몰라도, 사실을 알고 나면, 그는 나를 오늘날 여기까지 있게 한 불상한 희생양이며, 둘도 없는 귀한 효자라고 말해 줄 것이다. 지금 그는 몸도 약하고 후사가 없지만, 형제우애가 돈독한 그의 누이와 매제가 함께 있고, 나를 여기까지 인도해 주신 하나님께서 결코 이 아이를 모른다 하지 않으시고, 그의 여생을 끝까지 책임져 주시리라 굳게 믿는다. <오늘의 말씀> 네 하나님 여호와께 서원하거든 갚기를 더디하지 말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반드시 그것을 네게 요구하시리니 더디면 네게 죄라(신 23 : 21) 네가 하나님께 서원하였거든 갚기를 더디게 말라 하나님은 우매자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서원한 것을 갚으라(전 5: 4 ) 샬롬 2012/11/11 주일아침 백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