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짝을 만남 - 백호의 여로 (12)
- 내 짝 변경희는 문자 그대로 나의 조강지처(糟糠之妻)다. 가난한 남편에게 사랑 하나를 보고, 시집와서 경제적으로 어려운 목회 생활을 할 때, 함께 고생한 조강지처다. 오늘 내가 이렇게 있는 것은 바로 하나님이 짝지어주신 내 아내의 덕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 단면을 나의 일기장에서 찾을 수 있다. "며칠 사이, 나는 아주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타주로 시집간 딸이 친정에 찾아 왔기 때문이다. 첫날밤 모녀 간에 무슨 이야기가 그렇게 많은지, 나도 솔깃해서 듣고 있는데, 내 마음을 저리게 하는 이야기가 있었다. '엄마 요새는 참 건강해 보여 옛날 한국에 있을 때 버스만 타면 그렇게도 졸더니 이제는 통 조는 걸 못 보겠어요.' '그래 맞아. 그때 엄마가 영양실조였던 가봐. 어쩌다가 누가 생선이나 고기를 가져다 주면 너희 먹이려고 나는 먹지 않고 남겨두었단다.'" 이 말을 듣는 순간 내가 얼마나 아내에게 죄송스러웠는지 모른다. 또 한번은 아내가 지난날의 이야기를 하다가 이런 말을 했다 "정말 우리 아이들은 너무 먹지 못하고 자랐어요. 아이들 셋이 다 밤이면 배가 고파서 자지를 못하고, 밤새 빈 젖만 빨아대는데...." 이 때에 못난 남편 만나 고생한 아내가 애처로워 눈물이 핑 돌았다. -1999년, 어느 날의 일기에서- 그렇다 오늘의 자녀들이 저만치 자라서 각기 자기들의 삶을 잘 살아가는 것이 다 가난 속에서도 가정을 굳게 지켜준 아내의 덕분이 아닐 수 없다. 마누라 자랑은 팔푼이가 한다고 하지만, 오늘은 팔푼이 소리를 듣더라도 몇 가지 마누라 자랑을 하고 싶다. 첫째는 검소하다, 절대로 사치라는 것을 모른다. 둘째는 절약한다. 먹다 남은 음식이나 물건을 함부로 버리는 법이 없다. 셋째는 자족한다. 있는 것으로 생활한다. 절대로 남편에게 돈 많이 벌어오지 않는다고 말한 적이 없다. 교회서 봉급을 적게 준다고 불평한 적도 없다. 내가 무의촌 교회를 섬길 때에도, 그리고 이민 와서 개척교회를 할 때에도 아내는 불평하지 않고 잘 내조하였다. 대형교회를 부러워하는 소리를 들어본 적도 없다. 넷째는 아내의 입방아 때문에 나에게 욕이 돌아온 일이나, 아내의 말실수로 교인들 간에 문제가 일어난 일이 없었다. 다섯째는 언제나 야당이다. 설교시간에 거슬리는 것이 있으면, 혼자 끙끙거리다가, 교인의 입장이 되어 나에게 충고를 한다. 여섯째는 건강식에 철저하다. 가급적이면 외식을 삼가한다. 그 덕분에 아직 건강을 유지한다. 일곱째는 매사에 신중하다. 속도가 좀 느린 것이 탈이지만, 실수하는 법이 거의 없는 편이다. 어느 모로 봐도 조실부모하여 예절이 부족한 야생마 같은 나에게 비해서는 가정교육을 제대로 받은, 참으로 분에 넘치는 짝을 하나님께서 만나게 해 주셨다. 어떻게 이런 짝을 만났는가? 1957년 가을 대학 3학년 때, 뭔가 고민에 잠겨있다가 백주에 신기한 꿈을 꿨다. 나는 무거운 짐을 지고 험한 산길을 올라가고 있었다. 땀을 흘리며 산마루에 이르니 오른 쪽에 넓은 호수가 열리며 시원한 바람이 솔솔 불어 내 이마에 젖은 땀을 씻어 주었다. 호수 왼편에 아득히 이어진 오솔길이 보이는데, 누구의 음성이 들려 왔다. “이제 너는 저 길을 따라 가면 되느니라.” 깨어보니 꿈이었다. 그것은 분명 뭔가 주님께서 암시해주시는 소망의 음성임에 틀림없었다. 그 후 총회신학교에 재학 중인 나의 고교 동창인 정연승 군(부산 한만교회 원로 목사)으로 부터 동대문 밖 용두동에 있는 수산장 교회(고원용 목사)에서 신학생 중에서 성가대 지휘를 할만한 전도사를 구하니, 날 보고 가서 봉사할 마음이 없느냐고 물었다. 그 교회는 625 때 희생된 유족들이 중심이 되어 세운 교회이고, 당장은 사례금도 없을 것이라고 했다. 나는 그 때 해방촌 교회서 어린이 성가대를 인도하던 터라. 좀더 발전하고 싶어서 기쁜 마음으로 승낙을 했다. 추수감사절을 한달 앞두고, 내가 처음 부임하던 1957년 10월20일 주일날, 목사님이 광고 시간에 나를 소개하시는데, 그날 처음으로 출석한 또 다른 한 사람을 소개했다. 그가 바로 55년의 긴 세월을 나와 함께 살아온 나의 아내 변경희다. 참으로 신기한 만남이다. 그 때에 목사님은 아내의 인적 사항을 소개하면서 그의 할아버지가 평양의 유명한 장대재교회 목사님이었고, 육이오 때 순교하신 변린서 목사님이라고 소개를 하였다. 나는 그때 속으로 “내가 장차 목사가 되려면 저런 목사가정의 자녀와 짝을 지었으면 좋겠다”고 생각을 했는데, 그 생각이 적중되어 오늘까지 험난한 인생길을 함께 걸어가고 있다. 일직 성현들이 인생은 고해라고 말씀했지만, 반백년을 함께 살아가는 동안 어찌 인생항로가 순탄하기만 했겠는가? 그러나 그 신비한 꿈처럼 나의 길을 끝날까지 인도하시는 이가 주님이시고, 한날 한시에 아버지 집에서 나의 짝을 만나게 해주신 분이 주님이시라는 사실 하나만을 믿고 만난을 극복해 나갈 수 있었다. 대중 앞에 이런 말 하기가 너무 부끄럽지만 아내에 대한 고마움을 빼고서는 더 이상 회고록을 써나갈 자신이 없었다. 며칠 전 곤히 잠든 아내의 모습을 보니 지난날의 곱디 고운 모습은 어디론가 험준한 세월과 함께 다 살아지고, 이제 저승길에 오를 날이 다가오는데, "사람이 죽으면 저렇게 보일까...? 날 두고 먼저 가면 안되지. 가도 우리 함께 가야지, 어떻게 살아온 우리인데...” 하면서 잠든 아내의 볼을 살며시 쓰다듬어 보았다. "주께서 내길 예비 하시네 주께서 내길 예비 하시네 이제 하루하루를 주를 위해 살리라 주께서 내일 예비 하시네" 그렇다. 주님은 오늘까지 나의 길이 되셨고, 주님은 나의 짝을 예비해 주셨다. 내 짝은 조물주가 주신 이 세상에서 제일가는 나의 은인이요 이 세상에서 제일가는 나의 애인이다. "엄동설한 지나가면 양춘가절 돌아와 쏟아지던 소나기도 개인후에 햇빛나 어둔밤이 지나가면 밝은 아침오도다 크게 실망하였지만 새론 소망얻었네" (537장) 샬롬 2012년 10월 21일 주일아침 백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