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쪽의 첫사랑

- 백호의 여로 (10) - 
1953년 가을 석종이 아버지가 미국 유학길에서 돌아오신 후, 바로 서울 영락교회 동사 목사님으로 부임하여 가실 때, 나는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가 후원하는 대구 성당동에 위치한 신망원이라는 고아원에서 고아들을 돌보며 학업을 계속하게 되었다. 그 고아원은 주로 10대 전후의 전쟁고아들과 소년원에서 넘어온 아이들이었는데, 원생은 약 30여명 되었다. 그때 전임 원장이 어떤 부정으로 경질되면서, 후에 장신대 교수가 되신 주선애 선생님이 원장으로 새로 오시게 되었고, 나는 고아들을 돌보는 빅브라더(Big Brother)가 되었다. 아침마다 우리는 기도회를 가졌는데, 전임자에 대한 불신이 깊었던 아이들은 한동안 이상한 눈으로 우리를 바라보았으나, 날이 갈수록 원장님의 인격과 따뜻한 사랑에 감화되어 갔고, 자기들의 처지와 다름없는 빅브라더의 훈계에는 무조건 머리를 숙이기 시작했다. 야생마 같은 아이들이 그리스도의 사랑을 깨닫게 되어, 그들 중에는 후에 대학 교수, 목사가 된 아이들도 몇이 있었고, 사업에 성공한 아이들도 몇이 있었다. 우리는 주일이면 피난민이 주축이 된 대명동 달동네에 새로 생긴 대광교회에 출석했다. 그 교회 목사님은 신망원과 자매 고아원인 소망원 원장이신 최창영 목사님이었다. 그 때 주선애 선생님은 성가대 반주를 했고, 나는 지휘를 했는데, 대원 중에 나의 눈길을 끄는 한 여인이 있었다. 알고 보니, 그녀는 나보다 한 살이 많은 전쟁미망인이었고, 3살 난 딸도 하나 있었다. 평양이 고향인 그녀의 아버지가 형이야 동생이야 하던 친구가 있었는데, 우리 이후에 아들 딸 낳으면 서로 혼인시키자는 언약이 있어서, 해방 후 친구 아들이 혼자 월남해서 서울에서 공부하고 있을 때, 그를 약속대로 사위를 삼고 한 집에 살았다고 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9.28 수복 당시 인민군이 후퇴하면서 납치를 했는지 어쩠는지 행방불명이 되었고, 대구로 피난 온 이래 대광교회에 딸린 모자원에 살면서 탁아소 보모로 일하고 있었다. 하루는 그녀가 인사를 하면서 이런 말을 했다. "선생님, 고아원에서 고생이 많으시지요. 식사는 어떻게 하세요? 반찬은 없지만 성가연습이 끝나면 저희 집에서 점심을 하시지요" 하는 것이었다. 그녀가 이렇게 말하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이전 고아원 원장은 고아들에게는 양쌀 밥을 먹이면서, 자기 식구들은 따로 별식을 하는 바람에 고아들의 원성이 높았던 것인데, 새로 부임한 원장은 직원들이나 고아들이나 한자리에서 다 같이 양쌀 밥을 먹었고, 반찬이라야 겨우 고아원에 딸린 채전에서 나는 푸성귀가 전부인 것을 알고, 초췌한 나의 모습을 보고, 동정어린 마음으로 한 끼라고 대접하고 싶은 마음으로 그렇게 말했던 것이다. 이렇게 종종 그녀의 집에서 식사를 하게 된 것이 계기가 되어, 그녀는 전혀 상상도 못하는 중에 내 가슴에는 사랑의 꽃이 피어나고 있었다. 어느 날 식사를 하면서 나는 이런 고백을 했다. "우리의 처지가 서로 다르지만 다 불행한 사람들이니 힘을 모아서 앞날을 함께 설계해 나가면 어떻겠느냐"고. 뜻밖의 일이어서 그녀는 깜짝 놀랐지만, 거부하는 눈치는 아니었다. 이어서 나는 말했다. "우리가 이런 처지에서 혹 결혼이라도 한다면 남들의 웃음거리가 될 테니 앞으로 내가 열심히 공부해서 성공하면 결혼하자"고 했다. 그는 아무 말이 없었으나 기쁘게 받아 드리는 눈치였다. 그 후 우리는 잠시 동안 서로 위로하고 의지하며 즐거운 나날을 보내었지만, 왜 사람들의 눈치가 없었겠는가? 하로는 그녀의 외숙모가 타이르더라는 것이다. "야, 너 정신 차려라! 괜히 총각 놈하고 그래 봐야 나중에 후회한다!"라고. 실은 사모님도 생질녀에 장래가 걸린 문제라 반은 좋으면서도 반은 경계하고 계셨던 것이다. 그런 와중에 나에게는 신비한 일들이 나타났다. 그 시절에, 한국 방방곡곡에는 성령운동이 한참 전개되고 있었다. 우리 교회에서도 용문산 기도원의 나운몽 장로님이 오셔서 집회를 인도하셨다. 그때가 겨울 방학이라, 나는 시간마다 원생들과 함께 참석해서 은혜를 받았는데, 낮에는 '박군의 심정'을 가지고 강설했는데, 얼마나 은혜를 많이 받았는지 모른다. 마지막 날 새벽에는 안수 기도를 했는데, 그때 장로님이 하시는 말씀이 “안수를 받으면 당장 어떤 현상이 나타나기도 하지만 나중에라도 어떤 증거가 나타날 것이니 믿음을 가지고 기도를 받으라”고 당부를 하셨다. 장로님의 말씀과 같이 나에게는 아무 이상이 없었는데, 얼마 후 개학해서 교실에서 공부를 하고 있는데, 왼쪽 팔 등이 햇볕이 쬐는 것 같이 자글자글하게 뜨거워지기 시작하더니, 그것이 오른 팔로 옮겨가고, 또 얼마 후에는 엉덩이로부터 등골을 통하여 뒤통수까지 옮겨가더니, 다음에는 얼굴로부터 가슴팍과 배로, 마지막에는 발끝까지 한 2시간 정도 온몸이 불덩어리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 그때 나는 장로님의 말씀을 전혀 생각하지 못하고, "참 이상하다 죽을병이 걸렸는가?"하고 걱정하면서 돌아왔는데, 그날이 마침 삼일 기도회라, 교회에서 전도사님께 그 사실을 말씀을 드렸더니 "아이고, 성령의 불을 받았구만!"하시기에 나는 안심하고 기뻐하였는데, 그런 현상은 참으로 오래 지속이 되었다. 아침에 자고 일어나면 등이 뜨거워지곤 했다. 그러나 하도 이상해서 체온기로 체온을 재어봤는데, 체온은 정상이었다. 그 후 서울에 올라왔어도 그런 현상은 지속되었다. 아마도 그 때 피난민 학교가 서울로 환도하던 시기에 나는 심중에 장차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던 중이어서 주님께서 어떠한 경우에도 나와 함께 하신다는 증표로 나에게 그런 현상을 체험하게 하셨을 거라 믿고 어려운 환경에서도 마음이 든든하였다. 또 한 가지 사실은, 내가 상경하기 전 얼마 전에 꿈을 꿨다. 내가 무거운 짐을 등에 지고 온천지가 하얗게 눈으로 덮인 길을 걸어가는데, 한 곳에 이르러 한 발짝 너비의 개울을 훌쩍 뛰어넘는 순간 그 무거운 짐 보따리가 떨어져 나가면서 발 거름이 가벼워지는 꿈이었다. 깨어보니 식은땀이 이마에 흐르고 있었다. 지금에야 그 꿈이 무엇을 의미했는지 깨닫게 되었지만, 그때에 나는 멋도 모르고 그 이야기를 그녀에게 했더니, 아주 심각하게 듣고 있었다. 그 때에 내가 꾼 꿈은 내딴엔 눈같이 순결한 길을 걸어가고 있었지만, 내 자신에게는 무거운 짐이었고, 강을 건너 뛸 때에 그 무거운 짐이 벗겨졌다는 것은 앞으로 그녀와 헤어지는 것이 내 앞날에 유익이 된다는 것을 주님께서 미리 꿈으로 보여 주셨던 것이었다. 추운 겨울이 지나고 따뜻한 봄이 돌아왔다. 겨울동안 모진 추위를 견뎌낸 초원에는 파릇파릇 새싹들이 움트고 있었다. 나는 어느 날 그녀와 함께 탁아소 아이들을 데리고 초원을 거닐면서 우리가 앞으로 얼마간 떨어져 있어야 하겠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것은 피난 학교들이 모두 환도를 하는데, 우리 학교도 서울로 올라가니 나도 따라 갈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때 그녀는 놀라는 표정으로, "아무 대책도 없이 무턱대고 올라가면 어떻게 해요. 그간 제가 준비를 좀 해서 서울에 구멍가게라도 하나 내어 9월경에 같이 올라가자"고 했다. 그러나 나는 "이번 기회에 올라가지 못하면, 가입학한 처지라 다른 학교로 전학할 수도 없고, 9월에 올라가면 본교에 복귀는 되겠지만, 그만큼 공부가 늦어지니 올라가야 한다."고 했다. 더 이상 그녀는 말리지 못했다. 그러나 그 후 내가 떠날 때 자기도 잠깐 올라갔다 오면 좋겠으나, 한날 떠나면 남의 눈치가 보이니까, 친정에 연락을 해서 급히 다녀가라는 편지를 보내게 하여, 탁아소 일을 남에게 맡기고 내가 떠나기 일주일 전에 서울로 올라가 내가 상경하던 날 저녁에 서울역에 마중 나와 후암동 그녀의 집으로 가서 하로 밤을 잤는데, 부모님 뵙기가 얼마나 민망스러웠던지 말로 다 못한다. 이튿날 우리는 남산 길을 걸어 장춘단 공원까지 걸어가면서 즐거운 데이트를 했다. 그러나 지금 와서 생각을 해보니, 손목도 한번 제대로 잡아보지 못했으니 얼마나 한심한 놈이었던가. 그저 공원 뒷산에 둘이 앉아서 꿈같은 이야기만 하고 돌아왔으니 말이다. 그래도 돌아갈 때 내가 끼고 있던 손목시계를 풀어주면서 이것은 내가 사랑의 표로 주는 것이니 기념으로 받아두라고 했더니 말없이 받아 넣었다. 그가 일주일전에 서울 와서 무슨 일을 했겠는가 생각을 해보니, 나와의 관계를 부모에게 솔직히 말씀드리고, 임시라도 나의 유할 곳을 마련해 주었으면 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라도 내 자식이 그런 처지라면 기꺼이 승낙을 했겠는가? 참으로 철없는 불장난으로 알았을 것이다. 그래서 장춘단 공원까지 걸어가는 동안 거기에 대한 아무런 말이 없었던 것이다. 그나마 그녀가 다소 안심을 하고 대구로 내려갈 수가 있었던 것은 내가 자리를 잡을 때까지 대구 영락교회 학생지도 선생님으로 계시다가 서울 총회신학교로 올라오신 정남식 전도사님과 두원동 신학교 기숙사에서 함께 있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신학교 기숙사에서 얼마간 지내다가 우리 학교가 있는 해방촌 이귀선 전도사님 집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때 총회신학교에 다니는 이귀선 전도사님은 동생과 함께 공부하기 위해서 전라도 이리에서 상경하여 해방촌에 판자집 하나를 구입하여 자취하고 있었는데, 정남식 전도사님의 소개로 대구에서 함께 올라온 정연승 군(현재 부산 한만교회 원로 목사)과 함께 거기서 자취하면서 공부하였다. 집세도 받지 않았고, 쌀이 떨어지면 며칠씩 밥도 함께 먹었다. 전도사님의 동생 이윤선 군은 후에 조선일보 기자로 있다가 일찍 타계햇지만, 인정이 많아서 우리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식사당번은 번갈아 가며 했는데, 우물로 내려가 쌀을 씻어, 석유 곤로에 밥을 안치고 반찬은 늘 외 간장에 콩나물, 두부, 양파와 멸치가 전부였고, 굶을 때도 종종 있었다. 그러나 그 어려움 속에서도 공부에 열중할 수 있었던 것은 그녀가 내 가슴속에 살아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생기기 시작했다. 하로는 저녁에 우물가에 나가 쌀을 씻고 있는데, 동네 아가씨가 총각들이 밥하는 모양이 측은해 보였는지, 쌀을 대신 씻어준다고 하기에 나는 별생각 없이 고마워서 그렇게 하라고 했다. 그날 밤 나는 편지에 그 이야기를 하고, 겉봉에 'OOO 누나에게' 라고 했는데, 거기에 구만 오해가 생겼는지, 편지가 뚝 끊어졌다. 그래도 나는 별생각 없이 공부에만 열중하고 있었다. 드디어 여름방학이 시작되었다. 얼마나 기다렸던 날인가! 그날 밤차로 나는 대구로 내려갔다. 탁아소 정문에 들어서는데, 마침 사모님이 나를 보시고, 반가운 목소리로 안에 있는 그녀를 부르시면서, "야! 지 선생이 왔다."고 하신다. 그 소리는 마치 내가 한 식구라도 된 것 같은 다정한 느낌을 주었다. 그녀도 나를 보자, 반가워하였다. 그러나 어딘가 모르게 어색한 빛이 보였다. 필경 그간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 틀림없었다. 아마도 그녀의 집에서 재혼 독촉이 있었던 것 같았다. 게다가 내가 편지 겉봉에 '누나'라고 썼던 것이 그녀의 자존심을 상하게 했고 마음에 큰 충격이 되었던 것 같았다. 그러나 가장 결정적인 문제는 어리고 마무것도 모르는 나에게 있었던 것 같다. 그날은 금요일 밤이었다. 주일이 지나면 곧 여름성경학교가 시작되는데, 나는 그녀와 함께 탁아소에서 밤을 세워가며 여름성경학교에서 가르칠 노래 준비를 하면서 서울에서 지나온 이야기를 해 주었다. 새벽녘에 피곤해서 우리는 눈을 부치기로 했다. 불을 끄고 탁아소 마룻바닥에서 그냥 쓰러져서 잠이 들었다. 그때에 내가 손목이라도 잡아주고 입맞춤이라도 했어야 했는데, 이 멍청이가 아직 그런 것을 몰랐다. 후에야 나는 그것이 그녀를 실망시킨 결정적인 문제였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남녀의 사랑이란, '푸라토닉 러브'( Platonic Love)에 '바디 랭귀지'(Body Language )가 있어야 완전해 진다는 것을 후에야 절실히 깨닫게 되었다. 나는 신망원에 숙소를 정하고 원생들을 대리고 일주일 내내 여름성경학교에 나갔다. 그러나 나를 대하는 그녀의 얼굴은 점점 더 어두워 가고 있었다. 그러더니 어느 날 드디어 말문을 열었다. "우리는 처음부터 서로가 못 만날 사람들이었던가봐요. 이제 저를 잊으시고 열심히 공부하세요!" 하는 것이었다. 나는 올 것이 왔구나 하면서 슬픔에 잠기고 말았다. 나는 여름 성경학교가 끝난 후, 신망원 식구들과 함께 두 곳이나 산상집회에 참석했다. 하나는 용문산의 애향숙 창설 14주년을 기념하는 쌍7절 성회였고, 다음에는 청소년 전도에 힘쓰는 짤비스 목사님이 인도하는 주암산 성회였다. 나는 내 인생의 문제와 대학입시문제를 두고 열심히 기도했다. 개학을 앞두고 상경하면서 나는 다시 한번 그녀에게 호소했으나 그녀의 마음은 꽉 닫쳐 있었다. 올라갈 때 맡겨 두었던 사진첩과 기념으로 준 시계도 돌려주었다. 한동안 방황했으나 세월이 흘러 상처도 아물고, 어엿한 대학생이 되었다. 그때 한경직 목사님이 숭실전문학교 학장님이었는데, 나는 순교자 자녀 장학금을 받았고, 가정교사를 하면서 대학공부를 계속했다. 주일이면 해방촌 교회 주일하교 성가대를 지도하였다. 제 1 성가대 지휘자인 이삼은 선생님은 연세대 종교음악과 출신이었는데, 나운영 선생님의 지도를 받아 민속조의 성가곡을 많이 작곡하셨고, 주일마다 공과를 주제로 백옥현 선생님이 작사를 하고, 이삼은 선생님은 작곡을 했고, 나는 남녀 3부로 합창하는 어린이 성가대를 인도했다. 참으로 즐거운 시절이 다시 찾아왔다. 그러던 어느 날 약 2년 만에 해방촌 교회에 그녀가 출석을 했다. 대구에서 서울로 이사를 했는데, 해방촌에 계시는 할아버지-할머니 댁에 당분간 있기로 했다는 것이다. 또 해방교회에 가까운 일가되시는 장로님 한 분이 계셨는데, 그분의 추천으로 성가대원이 되어 그녀는 알토 자리에, 나는 테너 자리에, 그것도 바로 내 앞자리에 앉아서 성가를 불렀으나 이상하게도 옛날의 감정이 전혀 살아나지 않았다. 그렇다고 미워하지도 않았다. 전혀 사랑의 감정이 차단되어 버렸던 것이다. 아마도 내가 입은 상처가 지난날의 사랑의 감정을 다 삼켜버린 것 같았다. 그러던 어느 주일, 대구 대광교회서 함께 지내던 여집사님 한 분이 나를 찾아와서, 그녀의 부모님이 정식으로 결혼식도 올려주고, 현재 할아버지가 살고 있는 집도 내어 줄 테니 그녀와 결혼할 의사가 없느냐고 하였다. 그러나 나는 가볍게 거절하였다. 그리고 어느 날, 그녀가 주일예배를 마치고 돌아가면서 처음으로 나에게 할 말이 있으니 꼭 자기 집으로 가자는 것이다. 할아버지 할머니는 어디 나가 안 계시고, 점심을 준비하는데, "선생님, 오늘은 제가 준비가 없어서 있는 그대로 차려드리지만, 다음에 오시면 잘 차려 드릴게요!"하면서 무엇인가 이미 체념했다는 식으로 여유 있게 말을 하고 있었다. 식사가 끝난 후에 그녀는 정중하게 말을 했다. "언제부터 부모님이 절보고 재혼을 하라 하시는데, 1.4 후퇴 때 북에 부인을 북에 두고 온, 총회신학교를 졸업한 전도사입니다.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어요?"하는 것이다. 그녀는 내 입에서 '그건 안 돼!'라는 대답이 나오기를 기대했을지 몰라도, 나는 그 말을 해 주지 못했다. 이것이 그녀와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반쪽의 첫사랑. 나는 이상의 날개를 제대로 펴보지 못한 새장에 가친 파랑새였다. 그때 나의 수호천사가 밖에서 잠긴 문을 열어만 주었더라면 훨훨 날아가 짝을 지었을 것인데, 사랑의 여신도 그만 기다리다가 지쳐서 돌아가고 말았던 것이다. 비록 짧은 사랑의 계절이었지만, 나의 첫사랑은 그런대로 의미가 있었다. 그 사랑 때문에 비천한 한 고아가 고난의 길을 돌파할 수 있는 용기를 얻었고, 그것이 하나님의 길이 아니었기에 돌아설 수 있는 결단이 있었고, 사랑의 기쁨이 무엇인지 알기에 연인들의 사랑을 축복하고 시랑의 슬픔이 무엇인지 알기에 실연당한 사람들을 위로할 수 있고. 사랑의 이별이 있었기에 오늘의 축복받은 가정이 있게 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어 만사를 주관하시과 나의 길을 인도하시는 하나님께 감사드릴 따름이다. 그 후 20년의 세월이 흘러 내가 서울에서 목회할 때, 주일예배에 참석했던 한 여청년이 인사를 하는데, 어디서 많이 본 듯했다. 알고 보니 그때 3살 났던 그녀의 사랑하는 딸이었다. 장로회 신학대학 기독교교육학과를 졸업하고 모교회 교육전도사로 있으며, 어머니는 경기도 일선지방 모교회 사모님으로 슬하에 다윗과 같은 튼튼한 아들 셋을 두고, 목회에 전념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무척 기뻐했다. 그것은 그녀가 행복하기를 바랐던 것이 나의 기도의 제목이었기 때문이다. 나의 첫사랑 이야기는 이미 아내에게도 다 털어 놨던 터라, 아내도 그날 찾아온 손님을 따뜻이 대접해 보내는 그 모습이 참으로 아름답고 고마웠다. 샬롬! 2012/9/30 주일아침 백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