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의 탈출 - 백호의 여로 (8) -
1951년 봄, 제 2 국민병에서 돌아와 얼마간 몸을 추스른 후 다시 일터로 나갔다. 그 일이란 역시 막노동이었다. 부산 제 3 부두 군수품 하역장이었다. 어떤 날은 운이 좋아서 군일들의 야전용 비상 식품을 운송하는 화물선으로 배치를 받으면, 쇠고기 깡통이며, 맛있는 각종 음식을 배가 터지도록 먹을 수가 있었다. 그 재미가 임금 몇 푼 받는 것 보다 훨씬 더 좋았던 것 같았다. 그러나 하루는 내 자신의 장래를 생각하다가, 이렇게 막노동을 하면서 세월을 보낼 수는 없으니, 차라리 고향으로 찾아가서 사정을 하고 무슨 일을 하더라도 공부를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참으로 꿈에도 그리던 고향 가는 길이었다. 그곳에는 할아버지가 손이 늦어 7촌 조카를 양자로 삼았고, 아버지가 북으로 가실 때, 할아버지가 경영하시던 약방이며, 선산이며, 대대로 내려오는 얼마의 전답도 다 양자이신 큰아버지에게 맡기고 가셨다. 북에 있을 때 들은 이야기로는 할아버지가 지은 교회도 아버지가 고향으로 돌아오시기만 하면 언제든지 목회를 하시도록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터라, 나는 막연하지만 기대를 가지고 고향으로 찾아갔던 것이다. 그러나 나의 기대는 어긋났다. 고향의 친적들은 겉으로는 나를 박대하지 않았지만, 내가 거기 있는 것이 눈의 가시 같이 보였던 것이다. 하로는 큰어머니가 나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다. "니 절대로 누구의 자손이라고 말하지 말레이. 느그 할배가 못할 일을 했기 때문에 느그가 고향을 떠난기라. 그리 알고 니 절대로 니 할배가 누구라고 말하면 안된데이." 나는 무슨 영문인지도 모르고 아무 말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교회서나 동네에서 내가 누군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후에 고모에게 듣고 알게 된 것은 선산에 달린 논밭이 좀 있는데, 영천에 살고 계시던 할머니의 남동생을 선산지기로 두고 북으로 갔는데, 아버지 세상 떠난 것을 알고, 큰어머니가 그 산지기를 내 몰고, 그 자리에 자기 친정 식솔들을 데려다 놨다는 것이다. 나는 이 이야기를 듣고 나서야 그때 큰어머니가 왜 내가 누구의 자손이라는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한 이유를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나는 이렇게 고향에 와서 공부할 기회는 찾지 못하고, 논밭에 나가 머슴같이 일을 해야만 했다. 풀을 베어다가 퇴비장에 채워야 했고, 체소 밭에 인분을 퍼다가 거름을 줘야 했고, 장날이 되면 할아버지 때 심어놓은 미나리 밭에서 미나리를 베어 10리 길이 넘는 포항 시장에 가서 팔아 와야 했고, 좀 한가한 날이면 소를 몰고 들에 나가 꼴을 먹였는데, 그 날이 나에게는 참 즐거운 날이었다. 그 때에 나와 10 촌 간인 형제들은 다 중학교, 고등학교에 다니고 있었는데, 나는 얼마나 부러웠는지 모른다. 어느 날 동생들의 책장에서 King's Crown이라는 중학 1학년 영어 자습서를 발견했다. 나는 소를 몰고 풀밭에 나가는 날이면, 혼자 거기서 영어 공부를 했다. 지금 생각하니 그것은 영어 공부도 아니었다. 겨우 알파벳을 외우고 쓰고, 그리고 문장을 읽는데, 나중에 알게 된 것이지만, 꼭 독일어 발음으로 영어를 읽었던 것이다. 예를 들면 "Base"를 "베이스"라고 읽지 못하고, "바세"라고 읽었던 것이다. 참으로 웃기는 영어 발음이다. 그러나 그때 공부한 그 엉터리 영어가 나에게는 큰 힘이 되었고, 앞으로 공부할 자신감을 심어주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새벽에 할아버지가 지었다는 교회에 나가서 기도를 드렸다. "하나님 아버지, 할아버지가 세운 이 교회에 지금 이 손자가 왔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의 앞길을 열어주옵소서. 언제까지 이렇게 지내야 합니까...." 그런데, 이 소자의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되었던 것이다. 이북에 있을 때, 여름 방학만 되면 새어머니 편의 외갓집으로 가서 함께 뛰놀던 어머니의 고종되는 김용진이 나 보다 한 살 많은데, 월남해서 대구 대봉동에 있는 미 육군 제8군 사령부에서 하우스보이(House boy)로 있다는 말었다. 나는 그 친구에게 편지를 보냈다. "내가 지금 공부할 목적으로 고향으로 왔으나, 여기서는 도저히 공부할 희망이 없으니 그곳에 일자리 하나 얻어 달라"고 했다. 편지를 보내고 나서, 나는 추석을 며칠 앞두고 경북 영일군 기계면 거산리에 있는 친 외갓집을 찾아가 며칠을 지내고, 다시 고향집으로 돌아오니 동생이 좇아 나오면서 하는 말이, "언니, 언니, 대구에서 언니한테 편지 왔데이!“ 하는 것이다. 나는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른다. 친구로부터 답장이 왔던 것이다. 그런데 무슨 영문인지 어른들이 그 편지를 뜯서 보고는 나에게 건네주지를 않았던 것이다. 아마도 곧 추수할 시기라, 추수나 끝난 후에 가라고 붙들어둘 속셈이었는지 모른다. 나는 정말 속이 상했고, 화도 났다. 어떻게 남의 편지를 이렇게 깔아뭉갠단 말인가! 그간은 기가 죽어서 모든 불만을 속으로 삼켰으나, 이번에는 참을 수가 없었다. 당장 거기서 나와 대구로 찾아갈 결심을 했다. 다음날 대구를 향해 가는데, 참으로 무정한 사람들이었다. 그간 몇 달 동안 일한 것도 있는데, 노자라고는 한 푼도 주지 않고, 효자역에서 대구까지 가는 편도 기차표 한 장과 찐쌀 두어줌을 호주머니에 넣어주었다. (찐 쌀이란 추석 전에 덜 여문 벼를 쪄서 말려 찧은 쌀이다). <고향의 탈출> 꿈에도 그리던 나의 고향, 나의 7 대조 계창(啓昌)(1705-1777) 할아버지가 자리를 잡고, 200년 이상 후손들이 부귀와 영화를 누리던 고향 땅을 영영 등지고,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길을 따라 나서는 순간이었다. 이것은 마치 이스라엘이 애굽을 탈출하여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향하여 가는 길과도 같았다.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인도하셨듯이 나의 가는 길을 친히 인도하여 주셨던 것이다. . 생모의 고모님이 대구 남산동에 딸과 함께 살고 계셨다. 그 고모 할머니는 일찍 홀몸이 되어 딸 둘을 키웠는데, 늘 우리 집에 와서 사시다 싶이 하셨고, 그 큰 딸은 아버지가 대구 신명여고에 보내어 공부도 시켜준 우리와는 절친한 사이었는데 그 고모 할머니의 사위 김용진(동명이인) 장로가 남산교회에 다닌다는 말을 외가에 갔을 때 들었다. 나는 남산교회를 찾아가 김용진 장로의 집을 찾을 수가 있었다. 그날 밤 그 집에서 하룻밤을 자고, 다음날 아침 대봉동 미 육군 제 8군 사령부 노무처 정문 앞으로 찾아갔다. 정문 앞 길 건너편에는 구멍가게가 몇 개 있었는데, 나는 한 음식점에 들어가 혹 여기 미군부대에 다니는 김용진(동명이인)이라는 사람을 아느냐고 물었더니, 주인아주머니가 말하기를 자기 집 단골손님인데 좀 있으면 조반 먹으러 나올 거라고 말하는 순간, 길 건너편 노무처 출입구를 가리키면서 "아! 마침 저기 나오고 있네요!" 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길 한 가운데서 만나 부둥켜안고 얼마나 반가와 했는지 모른다. 그런데 그 친구가 하는 말이 "너 참 잘 왔다. 내가 먼저 번 보낸 편지에 한 보름 후에 일자리가 하나 날 것 같으니 그때 봐서 다시 통지해 준다고 했는데 어떻게 이렇게 미리 왔구나! 참 잘됐다. 오늘 아침에 내 옆 동에서 일하는 아이가 갑자기 그만두게 되었다. 내가 이미 노무처에 부탁해 둔 것이 있으니 잘됐다." 하면서 그 길로 나를 노무처 사무실로 데리고 가서, 자기가 신원 보증을 서고 한 5분 만에 간단하게 모든 수속이 끝났다. 정말로 또 하나의 신비로운 드라마가 연출되었던 것이다. 나는 이렇게 하여 처음으로 마음의 안정을 찾고, 그 때부터 주경야독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나는 이와 같은 일련의 사건을 통해서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을 절실하게 체험할 수 있었다. 어떤 이들은 그것은 우연의 일치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나에게 있어서는 그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라, 단 1 초도 착오가 없는 하나님의 계획이었다, 15일 후, 그것도 분명하지 않았던 일을 하나님은 앞당겨서 나의 앞길을 이렇게 인도해 주셨던 것이다.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잠3:5-6)) 샬롬! 2012/9/16 주일아침 백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