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기한 체험 - 백호의 여로(7) -
(소집된 제 2 국민병) 그 날도 나는 미군의 군수물 하역장인 인천 부두로 나가 야간 작업을 하고 집에 돌아오니, 동회에서 제 2 국민병 소집 영장이 나와 있었다. 그때가 중공군이 인해전술로 다시 한반도를 침략하기 시작하던 1950년 12월 중순이었다. 정부에서는 병력의 손실을 막기 위해서 군경과 공무원을 제외한 만 17세 소년으로부터 40세까지의 장정까지 합쳐서 서울과 인천 등지에서 50 여만명의 장정들을 제 2 국민병으로 소집했던 것이다. 상부의 지시를 따라 담요, 양은 식기 둘, 수저, 칫솔, 옷 몇 가지 등을 챙겨 집결 장소인 인천 송현국민학교로 나갔다. 아마 그날에 소집된 수가 교정을 꽉 채웠으니 한 2 천 명은 족히 되었을 것이다. 늦게까지 인원을 점검하고 해질 무렵 출발하여 첫날은 밤에 인천에서 수원까지 걸었다. 간밤에 한잠도 자지 못한 탓으로 나는 졸면서 따라 가다가 몇 번을 깜박깜박 길바닥에 풀쑥 주저앉았는지 모른다. 그렇게 출발해서 경상남도 통영까지 1000리 길을 걸어갔다. 잠자리는 약 20명 단위의 민박이었고, 하루 분의 식사까지 그 가정에서 담당했다. 어떤 가정에서는 융숭한 대접을 했고, 형편에 따라 그렇지 못한 가정도 있었다. 그렇게 남하한 1000리 길 여정을 살펴보니, 인천-수원-죽산-장호원- 충주 - 문경-상주-군위-영천-경산-청도-창령-하남- 창원- 마산-고성- 통영이었고, 주로 중부전선으로 남하했는데, 제일 많이 걸은 날은 충주에서 문경, 창원에서 고성까지 하루에 약 140리 길을 걸었다. 중부전의 산야에는 전쟁의 상처가 완연했다. 전사한 군인들의 해골과 여기 저기 널린 국군과 인민군의 팔다리가 눈에 띄었다. 하루는 한 5 리 쯤 전방에서 '꽝!' 하는 폭음과 함께 검은 연가가 하늘에 치솟는 광경을 보았다. 그곳을 지나다가 보니까 앞서가던 우리 일행이 논에 널려있는 대전차 지뢰를 주어다가 장난 삼아 누가 멀리 던지나 내기를 했다. 지뢰의 두께는 약 8cm, 직경은 약 30 cm 되어 보였는데. 그것을 주어온 사람은 던진 사람 우측에 서 있어서 살았고, 그것을 받아 집어 던진 사람은 온몸이 갈가리 찢겨 길바닥에 피투성이로 널려있는 비참한 꼴도 보았다. 그래도 젊음이 좋았던 것은 그런 고된 여정 속에서도 불평 없이 이것이 나라를 위한 길이려니 하고, 20 여일 만에 이순신 장군의 격전지였던 통영(충무) 충무교 남쪽에 있는 진남국민학교 교실에 여정을 풀었다. 그때에 통영에는 꽁치 잡이가 한창이었는지, 아침 저녁으로 씻지도 않고 드럼통에 소금과 함께 끊인 꽁치 반찬 한 가지에, 밥은 거의 선 밥이었지만 그나마 좀 많이 줬으면 좋겠다는 바램이었다. 처음에는 꽁치라도 있었지만 며칠이 지난 후부터는 소금 국에 무 몇 쪽 둥둥 띄운 것이 고작이었다. 그것도 어느 날 탈영병이라도 생기면, 그날은 연대 기압으로 주먹밥에 소금물 무친 것이 전부였다. 이때에 유명한 방위군 사건이 있었고, 많은 방위군이 영양실조에 걸려 병이 났고, 나도 그때 죽다가 살아났다. 그 때에 국민방위군 고위층에서 50만 방위군에게 사용 될 209억원 중에서 53 억원이란 막대한 돈을 착복한 사실이 1951년 3월 29일에 국회에서 구성된 국민방위군 의혹사건 조사위원회에 의해 밝혀져서 방위군 사령관 김윤근, 부사령관 윤익헌, 재무실장 강석한, 조달과장 박창연, 보급과장 박기환 등 5명이 1951년 8월12일 군사재판에서 사형언도를 받아 총살되었고, 신성모 국방장관도 물러났고, 이시영 부통령도 사임하는 사건이 있었다. 그러니 장정들이 얼마나 굶주렸겠는가. 그때에 병들고 굶주려 죽은 자의 수가 9만에서12만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나는 그때 통영에 있던 방위군 제 102사단 6연대 제 2 대대 소속이었다. 하루는 중대장이 '오늘밤에 특별근무를 하는 사람에게는 야간에 누룽지를 제공할 것이다' 해서, 나는 그것이 탐나서 선득 지원을 했다. 특별근무란, 밤에 보초를 서는 것인데, 보초 당번 중에서 누가 어떤 사정이 생겨서 대신 서주는 제도였던 것 같다. 지금 와서 생각하니, 돈 좀 있는 장정 중에서 상관에게 뇌물을 주고, 보초를 대신 세우는 그런 편법이었던 것 같다. 그때는 춘삼월, 통영의 봄은 무척 따뜻했으련만, 그날 밤은 왜 그렇게 추웠던지, 비는 부슬부슬 내리고, 멀리 통영 앞 바다에서 울리는 구슬픈 기적소리를 들으면서, 비를 피하여 교실 처마 밑에서 깊은 상념에 잠겨있는데, 그날 밤은 약속받은 누룽지도 얻어먹지 못하고, 스쳐가는 봄바람에 온몸을 떨면서 한밤을 지새웠다. 그런데 바로 그날 밤 문제가 생겼다. 그날 아침 부대 전원이 운동장에 집결하여 점호를 하는데, 한 사람의 탈영병이 생긴 것이다. 도망칠 바에는 아주 멀리 사라졌으면 문제가 없었을 것인데, 얼마 가지 못해 헌병에게 잡혀왔다. 심문한 결과 서울 문리대 출신인데, 그 날밤 내가 보초선 그 시각 그 초소로 도망친 것이 들어 났다. 나는 그 일로 기합을 받고 두들겨 맞아 그후로 병이 나서 병동으로 격리되었다. 병동이라 해야 그저 격리시킬 뿐이었지, 의사도 간호원도 없고 약도 없었다. 다만 나와 같은 소대원 중의 한 친구가 식사 때마다 내 몫을 챙겨서 찾아와서 하는 말이, "좀 어떠냐, 먹고 기운 차려야지!"한다. "아니야, 먹을 생각이 없어, 네가 먹어라!" 하면, 그 친구는 단숨에 삼켜버리고 간다. 그래도 그 재미로 그 친구가 하루에 세 번씩 나를 찾아주었다. 그때 나는 꼭 죽을 것만 같았았는데, 제일 슬프고 부러웠던 것은 저 철조망 밖, 통영 아이들은 주일이 되면, 저렇게 학생 모자를 쓰고, 찬송가를 옆에 끼고 즐거운 마음으로 교회를 가는데, 나는 왜 여기서 이렇게 병들어 죽어가야 하는가!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병상에서 다시 하나님께 기도하기 시작했다. "하나님 아버지 내가 이렇게 죽을 수는 없습니다. 아버지는 목사요. 할아버지는 장로인데... 나는 커서 목사가 된다고 했는데, 왜 내가 여기서 이렇게 죽어야 합니까? 날 살려주세요! " 이렇게 간절히 기도했더니 한 보름만에 서서히 회복되더니, 또 이상한 일이 생겼다. 어느 날 병석에서 일어나서 바람을 쏘이려고 밖에 나갔는데, 인천 송림동 한 동네에 살던 한 친구를 만났다. 그는 연대본부 장교취사반에 배치되어 있는데. 나를 보고 반가워하면서 "너 많이 배고프지.. 장교 식사가 오후 1시면 끝나는데, 그때 장교 식당으로 들리라"는 것이었다. 그간 먹지 못했던 것을 보충할 절호의 기회가 온 것이다. 장병들은 그렇게 굶주리고 있는데, 장교식당에는 음식이 남아돌고, 반찬도 너무 좋았다. 나는 친구 덕분에 한 일주일을 얼마나 잘 먹었던지, 이제는 밥독이 올라서 그런지 얼굴이 퉁퉁 부었다. 그런데 어느날 장교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나오는데, 현관 저쪽으로 거제도에 수용되었던 제 2 국민병 중에서 나이 많고 영양실조로 병들어 불합격판정을 받은 귀향병들이 마지막으로 사단본부의 심사를 받기 위해서 가는 길에, 길을 잘못 들어 내가 있는 연대 본부로 들어오는 것이었다. 그 수가 약 30여명 되어 보였는데, 거지 몰골도 그런 모양은 없었다. 모두가 농촌에서 입고 온 핫바지 그대로였다. 그런데 그들을 보는 순간 나도 모르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도 저들 속에 함께 끼어 들면 좋겠다"하고 그들이 정열하고 있는 줄 속에 슬그머니 가서 섰다. 내가 수용된 6 연대 본부에서 사단본부는 약 10분 거리에 있었다. 안내자가 길을 잘못 들었던 것이다. 한 5분 후에 그들은 사단 본부로 가기 위해서 연대본부 영문을 빠져나가는데 나도 그들과 함께 태연하게 빠져 사단본부로 향했다. 실로 내 정신이 아니었다. 사단 본부에 도착하자 의무관이 한사람 한사람의 이름을 불러 따로 세우는데, 맨 나중에 나 혼자만 덜렁 남았다. 나는 그들 명단에 없었기 때문이다. 의무관이 날 보고, "야! 넌 뭐야!" 한다. "예! 저는 제 102 사단, 제 6 연대, 제 2 대대 XXX 입니다!" "야! 이 새끼! 6 연대 놈이 여길 왜 왔어, 거 별 놈 다 있네!" 의무관의 말이 틀린 말이 아니었다. 거제도에 수용된 방위군은 6 연대 소속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때 마침 그 자리에는 방위군 102 사단의 사단장이었던 장두관 대령이 나와있었다. 그때 의무관은 곁에 서있는 사단장에게 "저기 6 연대 소속 장병이 하나 끼어 있습니다!"하는데, 사단장은 "잔소리 말고, 신체검사해서 처리해!" 하는 것이다.
의무관은 명단에도 없는 나에게 신체검사를 실시한다. 

허리를 굽혀!, 펴!
다리를 굽혀!, 펴!
손을 올려!   내려!  
양손  손가락을 놀려 열을 세어봐!

이렇게 검사를 하는데,  나는 그대로 다 했다. 
꾸미고 거짓으로 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리고 난서 내과 진단이 있었다.  
나이가 40 정도 되어 보이는 군의관이 얼굴이 붕 뜬  내 얼굴을 바라 보면서, 
자식같은  생각이 들었던지, 인자한 음성으로 묻는다.
"나이가 몇이냐?" 

"17살입니다."

"어디가 어떠냐?"

"한 20일간 열병으로 알았습니다"

그랬더니 청진기로 내 가슴을 몇 군데 짚어보시더니  

"폐가 많이 안 좋구만.. 병종 불합격!" 하는 것이다.  

그리고 용지에 나의 소속과 신상을 자세히 기재하고, 며칠 안에 귀향증이 
연대본부로 갈 것이니 기다리라고 했다. 

그렇게 신체검사를 마치고 연대본부로 돌아오는데, 영문의 보초가 
어디 갔다오느냐고 묻기에 사단본부에 신체검사하러 갔다온다고 했더니 아무 
말 없이 드려보냈다.  

나는 동료들에게 그 말을 했더니, 너는 무슨 빽이 있느냐고 묻었다. 
사실 나는 아무 빽이 없었다.
다만 있었다면, 그건 하나님 아버지의 빽이었을 것이다.
이것은 확고한 나의 신앙고백이다.    

며칠 후 약속대로 귀향증이 나왔다.  부산까지 갈 얼마의 선비와  
배고프면 먹으라고 쌀 반됫박을 주었다.  나는 그 길로 통영에서 배를 타고 
부산으로 가서, 송도로 피난 내려온 외갓 집으로 찾아가 그리운 동생들과 
어머니를 만날 수 있었다.   

그 때에 방위군 102 사단 6 연대 소속 젊은이들은 그런데로 씩씩하였고,
얼마 후에 전선으로 배치되었고, 대부분 돌아오지 못한 것으로 안다.

나도 그때에 출전했더라면 북에서 인민군으로 내려온 형님과 총부리를 마주 
겨우었을지도 모른다. 참으로 민족의 비극이 아닐 수 없었다.

그 때에 당한 일련의 사건들을 지금 와서 공곰히 생각하면, 참으로 신기한 
일이 아닐 수없다. 그 일들은 내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였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이렇게 신기한 체험을 통하여 지금까지 내 생명이 살아있다고 믿을 때, 
지난날 겪은 나의 모든 고난 속에도 주님이 나와 함께 하셨고,  
앞으로 남은 삶 속에서도 함께 하실 것이며,  이 생의 모든 일이 끝날 때 
나를 영원한 아버지 집으로 인도해 주실 것을 굳게 믿으니 노경에 처한 내 
마음이 든든하기만 하다. 


샬롬!

2012/9/9
주일아침
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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