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효자는 빕니다 - 백호의 여로 (5) -
지금 와서 생각하니 나를 길러주신 어머니는 너무도 고마운 분이었고, 너무도 불쌍한 여인이었다. 어머니는 처녀시절의 약혼남이 결혼식 전야에 죽었다고 한다. 그 충격으로 인생을 비관하고 전도인이 되겠다고 선천고등성경학교를 다니셨다. 그러나 밑으로 시집갈 동생들이 셋이나 줄줄이 있어서 언니로서 죄책감에 못 이겨 아무데라도 시집을 갈 생각을 했는데, 아버지의 신학 동창인 김세진 목사님의 중매로 전처 자식이 넷이나 있고, 나이가 열세살이나 많은 아버지와 결혼을 하셨다. 얼마나 불행한 여인인가. 게다가 큰 형과는 나이 차이가 겨우 다섯 살이었으니 어머니의 시집살이가 얼마나 힘들었겠는가. 하루는 우리 식구가 한 상에 둘러앉아 아침을 먹고 있는데, 큰 형의 돌 씹는 소리가 들렸다. 그 순간 어머니의 얼굴이 홍당무가 되며 "참 이상하다. 왜 하필 돌이 큰 형 밥그릇에 들어갔는지!" 하시면서 당황하시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그나마 아버지와 오래오래 사셨더면 얼마나 좋았으련만, 겨우 8년을 사시고 34 살에 5 살, 4 살짜리 두 동생과 전처 자식인 나까지 어머니에게 떠맡기고 가셨으니 여인의 나이 서른 넷이라면, 한창 인생을 재미나게 살아야 할 나이인데 홀로 되신 가엾은 우리 어머니! 그 때 내 나이 14살, 그 철부지가 무엇을 알았으며, 어찌 어머니의 슬픔과 고독과 고난을 알았으리요. 이제 와서 생각하니, 우리 어머니는 너무도 불쌍한 여인이었다. 한국 사람의 정서에는 '계모'라 하면 장화홍련전을 연상하기 쉽지만, 우리 어머니는 그 반대다. 어지신 분이었다. 나에게 제 2의 생명을 주신 분이다. 아버지가 세상 떠난 이듬해(1948년), 외갓집이 반동분자로 몰려 38선을 넘게 되었을 때, 어머니는 나를 형에게 떠맡길 수도 있었지만, 그러질 않으시고 나를 데리고 38선을 넘었다. 이는 어머니의 기른 정이 낳은 정 못지 않게 컸다는 것을 잘 말해주고 있다. 지난 날 내가 철이 아직 덜 들었을 때에, 어머니에 대한 이런 저런 섭섭한 일이 있었다면 그건 아직 내가 나를 잘 몰라서 그랬지, 지금도 마누라가 나에게 잔소리를 하는 것을 보면, 분명 내가 어렸을 때, 말할 수 없는 허물과 잘못이 나에게 있었을 것이 확실하다. 지금 와서 생각을 하니, 오늘 내가 여기 이렇게 살아 있는 건만 해도, 사선을 함께 넘은 어머니의 은덕이었으니, 이 한 가지만으로도 어머니의 사랑과 은혜를 내 생명 다 해도 갚을 길이 없을 것이다. 자식을 낳은 모성은 천성이요, 자식을 길러준 모정은 인성이다. 천성의 모성은 신의 선물이요 인성의 모정은 인간의 산물이니, 이런 의미에서 나를 길러주신 어머니의 모정은 나를 낳아주신 어머니의 모성 보다 얼마나 더 위대한 것인가! 한 평생 고생만 하시다가 돌아가신 어머니의 그 크신 희생이 있어서 오늘 내가 여기에 있고, 어머니가 처녀시절에 하시고저했던 전도인의 그 일을 지금 이 자식이 하고 있으니, 어머니의 그 희생은 결코 헛되지 않았다. 38 선을 함께 넘은 나의 두 동생은 모두 일찍 세상을 떠났다. 막내 동생 정달(正達)은 월남전에 참전해서 크게 공을 세워 무공훈장을 받았고, 부상의 후유증으로 1985년 42세에 세상을 떠났지만, 얼마의 연금으로 어머님을 부양하였고, 어머니가 1995년 82세에 세상을 떠난 후, 바로 밑의 동생 정무(正茂)는 하나님의 뜻이 있어 독신으로 살다가 2001년 6월20일, 지병으로 59세에 세상을 떠날 때, 단칸방 전셋집에 살면서도 한푼 한푼 귀하게 저축해 놓은 4 천여 만원의 저금 통장을 남겼다. 이게 무슨 돈인고 하면, 동회에서 매달 극빈자에게 지급하는 생활 보조비 얼마와 보훈처에서 받는 막내 동생의 연금과, 그리고 어머니와 동생이 출석하는 이태원 세광교회 당회장 권영만 목사님이 순교자 유가족들에게 매월 10만원씩 지급한 금액 중에서 최소한 검소한 생활을 하면서 10 여년간 저축했던 저금 통장이다. 그러니 이렇게 안 먹고, 안 쓰고 저축한 귀한 돈을 누가 감이 한푼이라도 손을 댈 수 있었겠는가! 그리하여 장례식이 끝난 후, 아내와 의론하여 임감도장과 함께 이 통장을 세광교회에 선교헌금으로 바쳐, 지금 중국 신양에 '세광교회 중국신양 선교복지센타'를 건립하여 중국 선교에 이바지하게 되었으니, 나의 동생들은 세상에 왔다가 짧은 인생을 살고 갔지만, 참으로 형보다 더 보람있는 인생의 흔적을 남기고 갔다고 생각할 때가 한두번이 아니며, 다만 왜 내가 형으로써 아버지를 대신하여 동생들을 좀더 살뜰하게 보살피지 못했는가 하는 후회가 막심할 뿐이다. 우리 어머니는 인간적으로는 참으로 불행한 여인 중의 하나지만, 그 고난의 인생은 결코 헛되지 않았다. 한 아들은 인류의 평화를 위해 월남전선에 바치고, 또 한 아들은 연약했지만 믿음으로 중국의 선교사업에 크게 이바지 하게 하였고, 맏이로 늘 자랑스럽게 생각하시던 다른 한 아들은 살아서 어머니가 하시고자 했던 전도인의 일을 이렇게 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어머니를 생각할 때마다, 후회스럽고 마음 아픈 것은 남들은 다 잘도 부모님을 초청해서 좋은 곳을 구경도 시켜드리고, 맛있는 음식도 대접하고, 좋은 차도 태워드리고 하던대. 나는 왜 그렇게 못했던가 하는 것이다. 어머니 살아 계실 때에는 나이만 먹었지 철이 덜 들어 그렇게 못해 드렸고, 이제 철이 좀 들고 보니, 어머니는 이미 이세상 사람이 아니니, 앞으로 머지 않아 하늘 나라에 가면 제일 먼저 어머니에게 찾아가서 용서 부터 빌어야 한다. '어머니 용서해 주세요 어머니 사랑해요!' "울어봐도 불러봐도 못 오실 어머님을 원통해 불러보며 땅을 치며 통곡해도 다시 못 올 어머니여 불초한 이 자식은 생전에 지은 죄를 엎드려 빕니다." 샬롬! 2012/8/19 주일아침 백호 백호의 집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