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구두닦이 소년이었다 - 白湖의 旅路 (4) -
나는 구두닦이 소년이었다. 별로 자랑스러운 이야기는 아니다. 그러나 내가 이 사실을 말하고 싶은 것은 이 속에 내 인생의 기본적인 교훈과 삶의 철학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내가 열 살 때 목사가 되겠다고 서원을 했지만, 하늘에서 어떤 요술방망이가 내려와서 나의 어려운 문제를 해결해 주지는 않았다. 오히려 주님은 나로 하여금 신학을 공부하기 이전에 인생이 무엇임을 몸소 체험할 수 있도록 가난과 비천한 길로 나를 인도하셨다. 내가 월남하던 그 해는 내 나이 열 다섯 살이었다. 계속 학교를 다녔으면 중학교 2학년이었는데, 아버지가 세상 떠나신 후 1년을 외갓집에서 농사일을 했고, 이듬해에 월남을 했는데 그때 우리 가정 형편이 내가 학교에 다닐만한 여건이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내 장래를 깊이 생각하던 나머지, 내 스스로 내 인생을 개척해야 한다는 마음을 먹고, 제일 먼저 시작한 일이 구두닦이였다. 서울 충무로 입구 우측에, 일제시대에 유명했던 히로다(平田) 백화점 불탄 가장 자리에 판자집 몇 채가 있었는데, 그 중에 함흥에서 피난 내려온 한 가정이 무허가 하숙집을 경영하고 있었다. 거기에는 잠만 자는 지게꾼, 나 같은 구두닦이, 심지어는 도둑놈도 한 방에 있었다. 그러나 거기서 만큼은 빈부귀천이 없고, 서로 해하는 일도 없고, 밤이면 하루의 일을 이야기하며 웃음꽃이 피는 날도 종종 있었다. 어떤 도둑은 북에서는 꾀나 귀하게 자랐는데, 이남에 와서 할 것이 없어서 시골에 나가 빨래 널어 놓은 것을 몰래 걷어다가 팔아먹는 일을 했다. 하루는 들켜서 도망을 치다가 꼬꾸라져서 다쳤다는 이야기를 늘어놓아 우리가 한 바탕 웃기도 했다. 그런데, 구두닦이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것도 이미 경쟁시대에 들어섰던 것이다. 두 세 사람만 한자리에서 일을 해도 넉넉히 일당을 벌 수 있었는데, 어떤 날에는 열 명도 더 되는 일꾼들이 일렬횡대를 지어 사람만 지나가면 서로 자기 자리에 앉으라고 의자를 툭툭 치면서 손님을 유인한다. 개 눈에는 뭣만 보인다고, 구두닦이의 눈에는 사람이 보이는 것이 아니라, 구두만 보인다. 어쩌다가 미군이 지나가다가 구두를 닦는 날이면 복권에 당첨하는 정도의 횡재를 보는 날이기도 했다. 팁을 보태어 넉넉히 주고 가니까.. 그리고 한 사람이 걸려 들면 뜯어내기 작전을 한다. 이 구두는 가죽이 좋은데, 오래 신으려면 이 물약을 발라야 한다느니, 이쪽이 약간 까져서 희뜩희뜩 한데 이 염색약을 바르면 좋다느니, 별의 별 수단을 다 써서 한푼이라도 매상을 올리는 작전을 편다. 그렇게 해서 수단이 좋은 사람은 하루에 10 여명 손님을 받기도 하고, 나 같은 머저리는 하루에 두 사람, 세 사람, 많으면 다섯 사람 정도를 맞아 겨우 하숙비와 식사비로 '맥도날드' 정도의 수입을 올린다. 여기서 '맥도날드'라고 표현하는 것은 미국에도 고급식당이 있지만, 지나가는 걸인이나 노동자도 부담 없이 들어와서 사먹을 수 있는 식당이 있듯이, 육이오 전에 서울시에는 미국의 원조로 가난한 사람들에게 식사를 제공하는 '서울시 지정식당'이라는 것이 곳곳에 있었다. 쉽게 말하면 현재 한화로 1000 원짜리 한 장이면(미화 1불) 빵 한쪽과 수프 한 대접, 아니면 밀가루 국수 한 그릇으로 간단하게 한끼를 때울 수가 있었다. 그런데 나에게 있어서 제일 큰 문제는 주일이었다. 그때 나는 한 30분 걸어서 베다니교회(지금의 영낙교회)를 다녔다. 주일날은 평일보다 매상이 더 오르는 날이지만, 나는 오전에 교회를 다녀오면 오후에는 볼 장을 다 보게 된다. 그래서 주머니 사정이 급해지면 주일날도 구두 통을 들고 나가서 제일 먼저 좋은 자리를 잡는다. 내가 일하는 곳은 충무로 입구, 불타버린 히로다 백화점 맞은 편, 대륙악기 점 우측과 서울 국제우체국 현관 좌편 사이에 있는 노상이었다. 주일이지만 초장에 나가서 운 좋게 두 세 사람만 닦고 나면, 걷어치우고 부지런히 교회로 향했다. 어떤 날은 북에서 아버지가 목회하시던 교회의 교인이 그 길로 지나가면 나는 머리를 푹 숙이고 숨던 일도 종종 있었다. 아마도 이때의 회상이 나로 하여금 미국의 이민자들 중에는 장로, 권사, 집사할 것 없이, 주일날에도 문을 열어야 하는 인도아 수왓밋(In Door Swap Meet)에 예배 처소를 차리고 개점하기 전에 주일예배를 거기서 드리는 일을 아름답게 이해하게 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사실 예수님도 안식일이라도 먹을 것은 해결해야 한다는 원리를 말씀하였던 것이 아닌가(눅 6:1). 또 하나의 문제는 장마철이었다. 장마가 들면 구두 닦는 사람이 없다. 장마가 한 보름 이상 계속되면, 문제가 보통이 아니다. 그래서 간간이 해가 나면 재빨리 구두 통을 메고 길거리에 좇아 나간다. 다행히 한 사람이라도 구두를 닦아주면 빵 한쪽을 먹을 수가 있었다. 그러다가 나는 그만 병이 나서 할 수 없이 다시 인천에 계시는 어머님을 찾아갔다. 어머님은 나의 장래에 대한 별 대책이 없어서 내가 자립해 나가는 것을 말리지는 못하셨지만, 언제라도 찾아가면 마다하지 않고 반갑게 맞아 주셨고, 그해 겨울을 어머님과 함께 지내고 다시 상경해서 구두 닦기를 계속하였다. 구두 닦기의 수입이 넉넉한 날은 음식점으로 가서 밥을 사먹는다. 충무로 입구에서 가까운 회현동 입구 조흥은행 본점 우측에 피난민들이 모여서 장사하는 시장이 있었다. 그 안에 사리원에서 피난 와서 자그마한 음식점을 경영하는 교인 가정이 있었는데, 나의 단골 식당이었다. 하루는 주인이 남보고 여름철을 앞두고 냉면을 시작하려고 하는데, 물긷는 사람이 하나 필요한데 와서 일할 생각이 없느냐고 물었다. 나는 쾌히 승낙을 했다. 돈도 얼마를 받기로 했고, 밥도 거저 먹고 잠도 거저 자게 되었다. 나는 그 때 힘이 참 세었던 모양이다. 한 30 미터 떨어진 곳에 공동수도가 있었는데 거기서 물 초롱 둘을 양손에 들고 단 숨에 식당까지 하루에도 수도 없이 길어 날랐다. 그런데 하루는 물 초롱을 드는 순간 바른 쪽 무릎이 삐꺽 하면서 고통이 왔다. 그후부터 얼마간 구부리기가 힘들고, 구부리면 펴기가 힘든 현상이 한 20여 일간 있었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그래도 매일 물을 길어 날랐다. 그런데, 그런 환경 속에서도 별로 불평 없이 주어진 일을 하면서 하루하루 지냈다는 것이 참으로 신기하게 느껴만 진다. 주인도 친절했고, 요리사 아저씨도 친절하게 대해 주었다. 요리사 아저씨가 피곤할 때는 내가 대신 냉면을 반죽하기도 했다. 아마 그 일이 계속되었더라면 나는 그후 일류 요리사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해 여름에 육이오가 터졌다. 주인이 약속한 월급은 앞으로 일시불로 해준다고 하면서 3개월 동안 일한 것을 어디론가 피난을 떠나면서 한푼도 주지 않았다. 그후 나는 북에서 혼자 내려온 요리사 아저씨와 함께 먹을 것이 떨어저 한 사흘을 굶기도 했다. 그러자 회현동 동회에 북에서 내려온 사람들이 행정을 맡아 보는데 약간의 배급이 지급되어 허기를 면할 수가 있었다. 하루는 동회에서 동네 청년(민청)을 소집해서 저녁마다 학습을 했는데, 나는 그 때에 북에서 인민학교 다닐 때 배운 '김일성 장군의 노래'를 청년들에게 가르쳐서 인기를 얻기도 했다. 장백산 줄기줄기 피어린 자욱 압록강 줄기줄기 피어린 자욱 오늘도 자유 조선 면류관 위에. .......... ............ 이렇게 아무 겁도 없이, 무슨 사상도 이념도 없이 그냥 기약 없이 그날 그날을 보내고 있는데, 하루는 동회에서 그날 오후 3시에 수도극장에서 '인민군 입성 환영대회'를 한다고 모이라는 통보가 있어서 나도 참석했다. 그런데, 북한의 인민군 위안단이 열렬하게 밴드에 맞춰서 노래와 춤으로 사람들을 황홀하게 하고서, 3천리 반도가 머지않아 통일이 되는데 위대하신 김일성 장군의 뜻을 받들어 이 영광스러운 성전에 의용군으로 참가할 사람들은 자진해서 앞으로 나오라고 한다. 많은 청년들이 앞으로 나가고 있었다. 그 때에 나는 생각하기를 "아니야, 내가 여기 속아서는 안돼! 내가 인민군 의용군으로 갈 수는 없다" 하고 뒷문으로 슬그머니 빠져 나왔다. 그리고 다음 날 동회로 가서, 사무장에게 "인천에 계신 어머님이 위독하셔서 급히 다녀와야 하는데, 한강 도강증을 하나 만들어 달라"고 했다. 사무장은 "아, 이 동무는 김일성 장군의 노래를 열심히 가르쳐 준 모범 청년이라"는 식으로 한강 도강증을 만들어 주었다. 그래서 다음날, 지금 생각을 해도 미련했지, 다 낡아빠진 이불보따리가 뭔데 그걸 재산이라고 옷 몇 가지와 함께 꾸려서 짊어지고 갔으니, 만일 헌병이 까다로운 사람 같았으면, 임시로 다녀올 사람이 이 보따리가 뭐냐고 캐물었을 터인데, 나이나 한 20여살 밖에 안 되 보이는 인민군 헌병은 내 모습을 보고 북에 두고 온 동생 같았던지, 도강증을 보더니 두말하지 않고 보내 주어서 하루 종일 걸어서 밤에 인천 송림동에 살고 계신 어머님 집으로 당도하게 되었다. 그때 어머님은 동생 둘을 대리고 별의 별 고생을 다 하시면서 살았는데, 살아서 찾아간 나를 반갑게 맞아 주셨다. 이렇게 나는 육이오를 인천에서 숨어 지내다가, 9.28 수복시 맥아더 장군의 인천 상륙작전도 친히 눈으로 볼 수가 있었다. 나의 당한 소년시절의 이 같은 일들은 지금 와서 생각하니 그것은 금으로도 살수 없는 인생의 값진 체험이었고, 훗날을 대비시킨 주님의 시나리오였던 것이다. 따라서 나의 40년 간의 목회생활 속에서 양들의 고난과 눈물을 조금이라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던 것이 분명하다. 이제 우리에게 주어진 어떤 고난도 전능하신 하나님을 신뢰하여 긍정적으로 받아드린다면 그것은 분명 우리에게 있어서 더 없이 좋은 인생의 교훈이요, 인생의 유익이요, 영생에 이르는 길잡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강조하고 싶다.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 (시119:71) 샬롬 2012/8/5 주일아침 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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