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선을 넘어 - 백호의 여로 (3) -
. 1946년 11월 3일은 해방후 처음으로 북한 전지역의 도 시 군 인민위원 3459명 중 1171명의 대의원을 뽑는 선거일이었다. 왜 하필이면 그날이 주일이었던가. 아버지는 그 날이 주일이라, 투표에 불참하셨다. 그것이 이유가 되어 당국의 주목을 받고 끌려가서 모진 고초를 당하시고, 후유증으로 자리에 누우신 후 종내 일어나지 못하시고 1947년 3월28일(금)밤, 4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셨다. 그 때 아버지가 남기고 가신 것은 아직 청춘의 나이에 홀몸이 되신 어머니(34세)와 다섯 살, 네 살짜리 배다른 동생 둘과, 성냥 반 갑과 쌀 반됫박 남기고 가셨으니 아버지가 예수를 믿고 주의 종이되어 고향 산천을 떠나 순례의 길을 떠나서 가정에 남긴 것이란 고난과 궁핍뿐이었으니, 지금 와서 생각하니 아버지는 참으로 성경말씀대로 "더 나은 본향"(히11:13-16)을 향해 걸어가신 믿음의 순례자의 표본이 되셨던 것이 분명하다. 나는 한때 아버지가 고향 산천을 버린 탓으로 자손들이 타향에서 고생을 한다고 원망도 했고, 일가의 손에 넘어간 재산을 찾아보려는 욕심과 갈등으로 잠을 이루지 못한 때도 있었지만, 어느 날 밤 꿈에 아버지의 이름이 뚜렷이 새겨진 황금으로 된 문패가 쓰레기통에 버려진 것을 보고 난 후, 모든 갈등을 씻어버릴 수 있었고, 무엇보다 고모님으로부터 조상들의 부귀영화가 얼마나 죄악된 삶이었다는 사실을 듣고 난 후에 조상의 유산에 대한 미련을 깨끗이 벌릴 수가 있었다. 고모가 이런 말씀을 하셨다. 족보에 보면 나는 '의제공장손직장공휘 개 장손참의공휘 39세손'(毅齊公長孫直長 公諱 開 長孫參議公諱 允源派 三十九世孫)인데, 옛날 어느 해 32세 되시는 계창 할아버지 (AD 1729-1777)(啓昌: 通政大夫(정3품) 肅宗乙酉生, 英祖丁酉八月五 日卒 ( AD 1729 - 1777)의 제삿날에 무덤에 부은 술이 게울 물 같이 동리까지 흘러내려, 그리로 지나가던 한 길손이 그 연유를 알고 탄식하기를 "어허! 어떤 집안 자손인지는 몰라도 장차 망하겠구나!"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집안에 자손이 귀했고, 아버지는 5대 독자로서 귀하게만 자랐고,방종한 생활을 하시다가, 어느 날 불국사에 놀러 가셨다가 선교사의 전도를 받고 회개하여 후에 목사가 되어, 지난날 조상들의 부귀영화가 모두 죄악의 유산이라는 것을 깊이 깨닫고 고향 산천을 떠나 순례자의 길에 올랐던 것이었다. 1947년 3월31일(월), 아버지의 장례식 날이었다. 신의주에서 부음을 받고 달려온 형님 말씀이 아버지 세상 떠나시던 그날 아침 동녘 하늘에 무지개가 뜨는 것을 봤다고 전한다. 우리가 살던 태산리가 신의주에서 동쪽으로 약 20리 떨어진 곳이었는데. 이는 분명 하늘도 무심치 않아 아버지를 기쁘게 영접했던 증거로 알고 우리는 모두 큰 위로를 받았다. 아버지의 운구가 교회 마당을 떠나는 순간, 나는 일평생 사는 동안 아직까지 그렇게 슬피 울어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아버지는 이렇게 세상을 떠나 그 교회(태산교회)의 조 장로님 선영에 한 자리를 빌려 장사를 지내고 훗날 이장하기로 한 것인데 65년의 세월이 흘러간 지금도 자식을 기다리는 무덤에는 잡초만 자욱하게 쌓여 있을 것이다. 그 후 외갓집에 1년을 가있는 동안, 주일이 되면, 낮예배 시간에 강단에서 설교하시는 목사님의 얼굴이 아버지의 모습으로 변하는 것을 여러 번 보았다. 저기 저분이 우리 아버지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하다가 그런 환상을 본 것이다. 그러나 무정한 세월 속에 슬픔과 상처를 묻어버리고, 이듬 해인 1948년 봄 우리는 38선을 넘게 되었다. 감시원의 눈을 피하기 위해서 가까운 이웃에 가는 양, 신의주에서 해주까지 네 번이나 기차표를 바꾸어 타야 했다. 첫 날은 신의주에서 지방선으로 약 70K 떨어진 피현에 가서 하루 밤을 자고, 다음날 피현에서 평양까지, 평양에서 다시 사리원에 가서 하루 밤을 자고, 다음날 다시 사리원에서 해주에 와서 하룻밤을 지냈고, 다음날 밤에 육로로 다른 안내원을 따라 18K를 걸어 38선 접경에 있는 어느 마을에 도착했다. 그런데 마지막 안내원은 우리를 38선 접경까지 대려다 놓고, 우려먹기 작전을 폈던 것이다. 오늘은 뭐가 어째서 못 넘고, 다른 날은 또 무슨 비상 경계다 하면서 한 일주간 붙잡아 놓고, 잠자리 값, 밥 값하면서 수중에 돈이 다 떨어져 심지어 월남하면 밑천이 된다고 흥남 비누 20여 개를 보따리에 넣었는데 그것까지 다 털리고 난 후에 38선을 넘게 되었다. 어머니는 그 연약한 몸에 무거운 피난 보따리를 이고, 다섯 살 난 동생은 내 등에 업히고, 여섯 살 난 동생은 손을 잡고 38선을 넘어가는데, 우리가 가장 긴장했던 것은 내 등에 업힌 막내 동생이 감기기가 있어서 가끔 기침을 한 것이었다. 만일 도중에 기침이 터지면 우리는 끝장이라는 생각에서 기침이 나더라도 꾹 참아야 한다고 단단히 동생에게 일러주었다. 등에 업히어 포대기를 뒤집어 쓴 동생은 몇 번의 기침이 나오려는 것을 꿀꺽 꿀꺽 참아내는 것을 보고 너무도 감사하고 대견스럽기도 했다. 우리는 이렇게 한 20분 안내원을 따라 논바닥을 걸어 나갔는데, 안내원의 말이 "이제 우리는 38을 넘었습니다. 저쪽에 반짝이는 불빛을 향해 곧바로 가기만 하면 됩니다"하고 안내원과 헤어졌다. 우리는 계속 논바닥으로 한참 걸어갔더니, 거기가 남한에 위치한 황해도 청단이었다. 서북청년단이 근무하던 중 우리를 만나 친절하게 환영하여 주었다. 거기에 야전 천막으로 꾸민 피난민 수용소가 몇 개 있었는데, 우리는 피곤한 하룻밤을 천막에서 세우고 간단한 수속을 마친 후에 다음날 다시 서울로 향해 가는데, 그때 여러 곳에서 몰려오는 피난민으로 인해서 서울로 직행하지 못했고, 몇 곳을 더 걸처야 했는데 연안으로, 토성으로, 개성으로 며칠을 지체하여 드디어 서울역에 내리게 되었다. 아, 꿈에도 잊지 못할 서울의 첫 광경! 눈앞에 남대문과 남산이 전개되고, 전차가 땡 땡 땡! 소리를 내면서 오가는 모습, 분주한 서울의 시민들, 그러나 역전에 서성거리는 가난한 지게꾼들의 모습과는 대조로 누구를 기다리는 부자의 화려한 미제 승용차는 참으로 인상적이었고, 여기에도 빈부의 차가 있고, 부자의 기쁨과 가난한 자의 슬픔이 공존한다는 사실을 그때에는 미처 몰랐다. 우리는 서북청년단의 친절한 안내로 영락교회에 이르렀다. 그때의 영락교회는 베다니교회라 했다. 이북에서 월남한 사람들은 일단 영락교회에 가서 등록을 해두면, 월남한 가족들이 언제나 쉽게 서로 만날 수가 있었다. 우리는 그 날로 청파동에 세 들어 살고 있는 둘째 외삼촌을 만날 수가 있었다. 그날은 사선을 넘어온 가족의 재회로 온집안에 기쁨이 넘쳐흘렀다. 참으로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길은 인간이 가히 측량할 길이 없다. 오래 전 일제 강정기에 외가의 어른들(도산 안창호 선생과 뜻을 같이한 흥사단의 황사용 목사, 황사선 목사. YWCA 총무였던 황혜수 여사)이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상해를 거쳐 미국 망명길에 올랐고, 이로 인해 외가는 미국에 근거가 있다 하여 반동분자로 몰려 38선을 넘어야 했고, 따라서 신앙의 절개를 지킨 아버지의 죽음이 나로 하여금 더 이상 그 땅에 발붙일 곳이 없게 하여 사선을 넘어 여기 까지 와서 살게 하셨으니 주의 자녀들이 세상에서 당하는 고난은 결코 헛되지 않으며, 그것이 생명에 이르는 길목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신하게 된다(마7:13, 14)).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롬8:1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로8:28). 샬롬! 2012/7/29 주일아침 백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