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의 첫 언약 - 백호의 여로(2) -
다섯 살 때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신 후, 언제나 할머니 품에서 잠자던 나는 아홉 살 때 할머니마저 세상을 떠나시고 나니 밤이 무서워졌습니다. 꼭 자다가 죽을 것만 같은 무서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랫방에는 아버지 어머니가 계시고, 나는 웃방에서 형과 함께 잠을 자는데 왜 그렇게 무서웠던지 모릅니다. 그래서 나는 잠잘 때 하나님께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불 속에 들어가서 무릎을 꿇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 밤도 잠 잘 자게 해 주시고, 내일 아침 건강한 몸으로 일어나게 해 주옵소서!" 이렇게 기도하고 자면 단잠을 잘 수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형이 장난으로 기도하는 나의 엉덩이를 발로 밟으면서 "야, 넌 왜 그렇게 청승을 떠니!" 하는 바람에 깜짝 놀라 일어났습니다. 그건 분명히 형의 장난이었으나 하나님께서는 몹시 노하셨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형이 또 그러면 어쩌나 싶어서 다음날부터는 꾀를 부렸습니다. 이불 속에 들어가서 배를 바닥에 깔고 다리를 펴고 자는 척하면서 기도를 했습니다. 기도가 끝나면 몸부림치는 척하면서 바로 누워 잠을 청했습니다. 그렇게라도 기도하고 나면 단잠을 잘 수 있었습니다. 독일의 신학자 슈라이에르마허(Schleiermacher1768-1834)가 "종교란 유한한 인간이 무한한 절대자에게 무조건적으로 의존하려는 절대의존감정 (das schlechthinnige Abhangigkeitsgefühl) (sense of absolute dependence)이다."라고 말한 것 처럼, 그 때 할머니가 세상을 떠나신 것은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의지했던 마지막 줄이 끊어진 샘이었습니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며 기도하기 시작했던 것 같습니다. 그 때의 나의 기도는 지극히 소박한 기도였지만, 참으로 나에게는 절실하였고, 하나님은 그 기도를 달게 받아 주셨던 것입니다. 그것은 내 생애에 있어서 참으로 아름다운 신앙의 체험이라고 생각합니다. 정말 할머니는 저 세상에 가시면서 불상한 나를 영원하신 아버지의 품으로 인도해 주신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나는 기도하는 법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결정적인 날이 왔습니다. 할머니가 세상을 떠나신 그 이듬해, 내 나이 열 살 때 나는 장티푸스(염병)에 걸려서 사경을 헤매고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어린 동생들이 혹 옮을까 염려하여 나를 격리시켰고, 아버지마저 왜 그렇게 무심하셨던지, 나는 홀로 병마에 시달려 신음하다가 어느날 밤 나는 갑자기 이불을 뒤집어 쓰고 하나님께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서원의 기도를 드렵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나를 이 죽을 병에서 살려주세요. 그리하시면 이후에 자라서 목사가 되겠습니다." 이렇게 이불 속에서 애써 기도하는 중에 온몸에 땀이 흠뻑 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더니 다음 날 아침 부터 회복되기 시작했습니다. 살아난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과 맺은 내 인생의 첫 언약이었습니다. 지금 와서 생각하니, 열 살 밖에 안된 어린 것이 목사가 뭔지도 모르면서 어떻게 목사가 되겠다고 했는지 잘 모를 일이지만, 분명 거기에는 하나님의 뜻이 계셨다고 믿게 되었습니다. 다만 한 가지 사실은 내가 여덟 살 났을 때, 어느 주일날 오후 교회 권사님 몇 분이 사택으로 찾아와서 아버지와 무슨 말씀을 나누고 계셨는데, 내가 들어가서 인사를 올리는 중에 권사님 한 분이 나에게 칭찬을 하시면서 "이 아이는 장차 지 목사님의 대를 이을 것 같습니다."라고 말씀 하시는데 아마도 그 말씀이 무의식 중에 내 마음에 잠재해 있다가 그날 그렇게 서원의 기도를 드릴 수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지금 그 권사님의 이름이 무언지,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 전혀 기억에 없지만, 그분의 말씀만은 아직도 생생하게 살아있는 것을 보면, 말의 축복이란 얼마나 그 위력이 강하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합니다. 그 후 내가 열네 살 나던 해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시면서 나에게 유언으로 남긴 말씀은 참으로 내 일생동안 나의 길이 되시고 빛이 되었던 것입니다. "정덕아! 나는 이제 세상을 떠나게 되었으니, 너는 우리 가문에서 제일 불상한 고아가 되겠구나. 그러나 너는 어떤 일을 만나던지 낙심하지 말고 너는 예수를 잘 믿으라, 그리하면 주님께서 너의 길을 인도해 주실 것이니라 그리고 너는 아버지의 대를 이어 목사가 되어 다오!" 아버지의 장례식이 끝난 후 교회의 사택을 비워주고, 평안북도 의주군 위화면 상단리에 있는 외가(새어머니 친정)로 이사를 가서 일년동안 농사일을 도우면서 지냈습니다. 그 해 여름(1947년) 그곳 상단교회에서 여름성경학교가 있었습니다. 나는 마음 속으로 무척 가고 싶었지만, 입이 떨어지질 않아 끙끙거리고 있었는데, 장로님되시는 외할아버지가 허락하셔서 나도 성경학교에 다니게 되었습니다. 참 오래 만에 농사일에서 해방이 되어 기쁘고 즐거운 한 주간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그 때에 배운 여름성경학교 노래는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하늘과 땅 새에 모든 법을 감추고/ 영원서 영원을 통하여/ 억천만 인생을 지도하는 성경은/ 세상에 비할 것이 없도다/ 배우세 배우세 참 도리를 배우세/ 어려서 어서 배우세/ 풀밭에서 여름을 허송하지 말고서/ 더워도 배우세. 그 때에는 여름 성경학교를 낮에도 하고 밤에도 했습니다. 낮시간이 끝나면 집에 돌아갔다가 저녁에 다시 모였습니다. 밤에는 주로 예배를 드리고, 선생님의 재미나는 이야기 시간과 또 학생들이 나가서 이야기할 수 있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반 선생님이 나를 보고 나가서 이야기를 하나 하라고 했습니다. 나는 용맹스럽게 나가서 우리 아버지에게 들은 이야기를 그대로 했습니다. 그것은 "바담풍" 이야기였습니다. 이야기가 끝나자 박수 갈채를 받고 들어오는데, 선생님이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면서, "얘, 너는 이 후에 목사가 되었으면 좋겠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또 한번 목사가 되라는 축복을 받은 것입니다. 아마도 이런 덕답과 축복이 나로 하여금 목사의 길로 가는 디딤돌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나는 이렇게 1 년을 외갓집에서 농사일을 하다가 이듬해 봄에(1948년) 어머니와 함께 38선을 넘어 월남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 외갓집 일가는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상해를 거쳐 하와이로 망명 중에 있었습니다. 이렇게 친척이 미국에 거주한다는 이유로 공산당으로부터 반동분자로 지목이 되어 외갓집 식구들은 모두 38선을 넘어 남쪽으로 피난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 때 나는 월남하기 전에 신의주 어느 공장에 다니는 둘째 형님을 찾아가서 나는 월남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 때 형님이 말렸습니다. "네가 지금월남을 하면 고생이 이만 저만 아닐 터인데 여기서 형과 같이 지내다가, 곧 38선이 터진다는데 그 때 형과 함께 고향으로 가자"고 했습니다. 그런데 어린 내 마음속에 "아니야, 난 지금 어머니를 따라 가야해! 그래야 공부도 하고, 이후에 목사가 될 수 있을거야!" 하는 생각이 들어서 형님의 만류를 뿌리치고 어머님과 함께 월남을 했습니다. 그 때 그 결단은 분명 주님이 함께 하신 것이라고 믿어집니다. 그 때가 1948년 4월, 곧 열린다는 38선은 64년의 세월이 흘러 갔어도 아직, 굳게 닫혀 있습니다. 만일 그 때 내가 이북에 그대로 남아 있었더라면, 지금쯤 나는 어떤 사람이 되었을까요? 그러나 나는 지금 여러분과 여기 있습니다. 어떻게? 그것은 전혀 하나님께서 나와 맺은 그 언약을 지켜주셨기 때문이겠지요. 나는 이제 나이 들어 마음이 힘들고 몸에는 이곳 저곳에 아픔이 노크 할 때 일찍 야외-성전으로 나가 주님과 함께 산책하며 이 찬송을 즐겨 부릅니다. "내 주와 맺은 언약은 영 불변하시니 그 나라 가기까지는 늘 보호하시네 주님을 찬송하면서 할렐루야 할렐루야 내 앞길 멀고 험해도 나 주님만 따라가리"(455장) 이렇게 찬송을 부르노라면, 모든 근심 걱정이 눈녹듯이 살아지지요. 지난날에 함께 하신 주님께서 지금도 함께 하신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지요. 사랑하는 여러분도 어떤 방법으로든지, 하나님과 맺은 언약이 있겠지요. 끝까지 잘 지켜 나가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변치 않는 사랑으로 세상 끝날까지 보호하시고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28:20) 샬롬! 2012년 7월 22일 주일아침 백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