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의 전설 - 백호(白湖)의 여로 (1) -
일전에 <625를 생각하며/이런 저런 이야기>라는 글에서 나의 살아온 소년시절의 이야기를 잠깐 했더니 어느 독자가 좀더 자세히 말해줄 수 없느냐고 하시기에. 별로 자랑할 소리도 없는 나의 생애를 공개하기가 부끄럽지만, 일평생 살아오는 동안 지금까지 한시도 저를 버리지 않으시고 저와 함께 해 주신 주님의 사랑과 은혜를 여러분과 함께 나눔으로 신앙생활의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까 해서 나의 소년시절의 삶의 체험을 몇 번에 걸쳐서 기록해 볼까 생각합니다. 문둥병도 고친다는 소문으로 경상북도의 영일군과 월성군 일대에서는 '지약국 池藥局'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할아버지는 유명한 한의사였고, 돈도 많이 벌었고, 10대 조상의 선산과 전답으로 인하여 3년 동안 흉년이 들어도 먹을 양식이 떨어지지 않았고, 가난한 이웃을 많이 도우면서 살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오직 한가지 흠은 집안에 손이 귀한 것이었습니다. 그리하여 할아버지는 7 촌 조카를 양자로 삼았는데, 그후 다행이 할아버지가 29세에 5대 독자인 나의 아버지를 보시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집안에 큰 경사가 났고, 금이야 옥이야, 애지중지 키웠으니, 아버지는 마치 온실에서 자란 화초처럼 세상의 풍상을 모르는 나약한 인생으로 귀하게만 자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와중에 할아버지는 후손을 일찍 보기 위해서 아버지 나이 15세에 장가를 보내어 아버지 나이 17세에 나의 큰 형님을 보게 되었고, 그후 계속 자손을 보아, 지금은 저 혼자 살아 남았지만, 저의 형제가 모두 5 남 1녀가 되었답니다. 부잣집의 5대 독자인 아버지의 운명도 참 고달팠을 것 같습니다. 그러니 아버지는 무엇 한 가지 인생을 제대로 배우기도 전에 어른이 되셨고, 기방출입을 하여 월말이 되면 외상 술값 받으러 오는 사람들이 줄을 이었는데, 할아버지는 "내 귀한 자식이 마신 것을 어찌 겠노!" 하시면서 두말 없이 물어주었다고 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우리 가문에 새날이 찾아왔습니다. 아버지가 불국사에 놀러 가셨다가 미국 선교사의 전도를 받고, 회개하고 예수 믿기로 작정하고 돌아오신 것입니다. 돌아와서는 할아버지에게 이렇게 고했답니다. "아버님 이제 저는 술을 끊고, 예수 믿기로 작정했습니다!" 우리 집안은 대대로 불교 집안인데, 할아버지는 아들이 예수를 믿고 술을 끊는다는 말에 정신이 번쩍 들어서 그 자리에서 부자 간에 약속을 했다고 합니다. "네가 술을 끊고 예수를 믿는다면, 나도 상투를 자르고 예수를 믿으마!" 이리하여 아버지는 예수를 믿고 대구의 성경고등학교에서 공무를 마치고 평양신학교에 가서 신학을 공부하여 1935년도 평양신학교 제 30회 졸업생이 되었고, 목사안수(지세연 목사)를 받아 경동노회 산하의 구정교회와 안강제일교회서 목회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할아버지(지영규 장로)도 예수를 믿어 사제를 들여 교회를 짓고 장로님이 되였는데, 그것이 경북 영일군 연일면 생지동에 소재한 (구)생지교회(지금은 연일교회)였습니다. 그러나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대접을 받지 못한다는 말과 같이, 아버지가 목사가 되신 후 정든 고향산천을 버리고 멀리 함경도로, 만주로, 평안도로 전전하시며 사목하는 바람에, 우리 집안에는 고난의 나날이 찾아오고 있었습니다. 할아버지가 고향에서 세상을 떠나신 후(1872-1936), 어머니는 내 나이 5살 때 세상을 떠나(1901-1938) 함경도에 뼈를 묻고, 새어머니가 오시기 전, 나보다 열살이 위인 누님이 16세에 함경북도 산상봉 (山上奉)에서 출가한 후 지금까지 소식이 없고, 어미 없는 어린 나를 키우시던 할머니(1871-1942)도 내 나이 9살 때 세상 떠나 평안도에 묻히시고, 나보다 15살 위인 큰형님도, 5살 위인 둘째 형님도 다 집을 떠났고, 나 홀로 새어머니 밑에서 서럽게 자라다가 내 나이 10살 때 죽을 병에 걸려, 사경을 헤매던 어느 날 밤, 나는 하나님께 서원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나님 나를 이 죽을 병에서 살려주시면, 이후에 커서 목사가 되겠습니다." 하나님은 나의 기도를 들어주셔서 기적적으로 그 다음 날 아침에서 일어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 날 이후 지금까지 험한 인생 길 걸어오는 동안, 주님께서는 항상 '내 발의 등이 되시고, 내 길의 빛이 되신 것'을 이제 세월이 지나고 보니 더욱 확실히 깨닫게 됩니다. 나의 신학교(미주한인장로교신학대학) 제자 중 박재국은 지금은 목사가 되었지만, 젊은 시절에 서독 광부로, 미주 어디로, 인생의 모진 풍상을 다 겪고 난 후 신학을 공부하여 졸업하면서 사은회 석상에서 하던 말이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이 납니다. "내가 살아오는 동안 하루하루는 내 뜻대로 산 것 같은데, 일생을 돌이켜 보니 내 뜻대로 된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렇습니다. 저 광막한 우주의 뭇 별들이 다 제 괴도를 따라 돌게 하신 이가 어찌 인생의 길인들 인도하지 않으시겠습니까! 나는 축복받은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400년간 애굽에서 종노릇 한 사실을 보고,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과 섭리는 고난이라는 관문을 반듯이 통과해야 한다는 사실을 절실히 깨닫게 됩니다. 고난의 눈물을 모르면 고난받는 인생을 바로 구할 길이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저는 Maxwell N. Cornelius(1842-1893)가 작사한 'Sometime we'll understand'라는 찬송을 많이 좋아합니다. 1. 지금은 몰라도 찾아오는 더 좋은 세상에서 우리는 알게 되리라 우리의 눈물의 뜻을 거기서 언젠가 알게 되리라 (후렴) 그럼으로 네 모든 날에 하나님을 의지하라 두려워 말라, 그가 너의 손을 잡고 계시니 비록 네 길이 암담할지라도 여전히 노래하며 찬양하라 언젠가, 언젠가 우리는 알게 되리라 2. 우리는 끊어진 줄을 다시 잡고 여기서 시작했던 일을 거기서 이루리라 하늘은 그 신비를 말해주리니 그날에, 정녕 그날에 우리는 알게 되리라 3. 우리는 알게 되리라 어찌하여 해 대신 구름이 그 많은 소중했던 계획을 덮어버렸던지 어찌하여 겁에 질려 노래가 그쳤던지 거기서, 언젠가 우리는 알게 되리라 4. 하나님은 길을 아시고, 손에 열쇠를 잡고 계시며 틀림없는 손으로 우리를 인도하시니 언젠가 우리는 눈물 없는 눈으로 보게 되리라 암, 거기, 거기서 우리는 알게 되리라 Sometime We'll Understand 1. Not now, but in the coming years, It may be in the better land, We’ll read the meaning of our tears, And there, sometime, we’ll understand (Refrain) Then trust in God through all thy days; Fear not, for He doth hold thy hand; Though dark thy way, still sing and praise, Sometime, sometime we’ll understand. 2. We’ll catch the broken thread again, And finish what we here began; Heav’n will the mysteries explain, And then, ah then, we’ll understand. 3. We’ll know why clouds instead of sun Were over many a cherished plan; Why song has ceased when scarce begun; ’Tis there, sometime, we’ll understand. 4. God knows the way, He holds the key, He guides us with unerring hand; Some time with tearless eyes we’ll see; Yes, there, up there, we’ll understand. 이 찬송을 바로 이해하려면, 작가의 배경을 살펴 봄이 도움이 될 것입니다. 19 세기, 펜실베이니아의 한 농가에서 태어난 코네리우스는 청운의 꿈을 품고 도회지로 나가 건축업에 종사하다가 작업 도중에 다리 하나를 다쳐 평생 불구자의 신세를 면치 못하게 되었을 때.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신학을 공부하여 목사가 되어 펜실베이니아 알투나에서 처녀 목회를 시작하게 되었다. 그런데, 사모님의 건강 문제로 따뜻한 캘리포니아 파사데나로 이주하여 거기서 다시 목회를 계속했는데, 교회가 성장하여 예배당을 중축하게 되었다. 많은 교인들이 후한 건축 헌금을 약속했으나, 얼마 후 경제불황이 닥쳐와서 많은 사업체가 도산하고 약속한 건축 헌금이 제때에 이행되지 않아 코네리우스 목사님 자신이 최선을 다하여 몇 년 후 은행 빚을 갚아 갈수가 있었다. 그런데, 이제 목회에 재미를 보고, 그간 고생만 하던 아내에게 뭔가 좀 보답할 수 있을만한 때에 그만 사모님이 세상을 떠나게 되었던 것이다. 코네리우스는 부인의 장례식을 친히 집례하면서 그가 늘 생각해 왔던 Sometime We Will Understand(언젠가는 우리는 알게 되리라) 라는 시를 설교 말미에 인용했는데, 그것이 너무 감동적이어서 거기 참석했던 한 심문 기자가 그것을 지방 신문에 실었다. 그 기사를 읽은 메이저 휘틀(Major Whittle)이라는 사람이 그것을 오려서 성경책 속에 석달을 넣고 다니다가, 그의 친구인 James McGranahan(1840-1907)라는 작곡가에게 부탁해서 지금 미국 사람들이 즐겨 부르는 찬송가가 된 것이다. 여기 '언젠가 우리는 알게 되리라'는 주제는 우리의 어려움과 고난이 하나님의 뜻 안에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당하는 고난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은 인간의 상식과 논리로써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오직 믿음으로만 극복해야 할 하나님의 비밀이지요. "우리의 당하는 고난은 장차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다."(롬8:18)고 성경은 말합니다. 그날이 오면 분명이 우리가 당한 이생의 모든 고난의 비밀이 밝혀지고, 오히려 그 고난에 대하여 더욱 감사하게 될 것입니다.(고전13:9-12). 지금 우리가 당하는 고난 속에는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있다는 사실을 결코 잊지 마라야 할 것입니다. 샬롬!
2012년 7월 15일
주일아침 
백호

백호의 집 바로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