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25를 회상하며 / 이런 저런 이야기


오늘이 6.25 바로 그날이군요.
62년전,  그 때 내 나이  17살.
그 때 나는 학교도 못다녔고,
서울 회현동 입구 우측에 있는 어느 시장 안에서
사리원에서 피난온 사람이 경영하는 음식점에서
심부름 하는 일을 하면서 밥을 얻어 먹고 살았지요.
요즘 미국이나 한국에서도 음식점에서 허드래 일 하는 사람 많이 보는데.
내가 바로 그 사람 중의 하나 였지요.  
내가 1948년도 5월에 월남해서 서울 본정통(충무로 입구)에서  
구두닦기를 하다가 수입이 되지 않아, 
그 냉면집에서 먹고 자고, 한달에 얼마씩 받기로 약속 받고,
3 개월을 일을 했는데. 그 때 육이오가 터져서, 
주인 식구들은 어디로 간다는 말도 없이 피난을 가 버리고.
나는 밀렸던 임금 한푼 받지 못하고 전전긍긍하다가.
며칠 후 한강을 넘어서,  인천에 살고 계신 계모님 찾아가서 
거기서 3개월 숨어살다가  맥아더의 915 인천 상륙작전 덕분에 
인민군 산하에서 해방되었지요.  기억이 생생합니다.

그러다가 중공군이 밀고 내려오는  14후퇴 때,  
나는 제2국민병에 소집되어,  1950년 12월 초순부터 12월 20일까지,  
20여일 간을 걸어서 통영(충무)까지 남하하여, 통영 어느 국민학교에서 
약 천여명 장병이 합숙하며 훈련을 받고,  임전태세를 가추고 있을 때에,  
나는 갑자기 치명적인 질병에 걸려서, 제2국민병에서 제대를 하여,  
대구에 가서 살면서 미군부대 하우스 보이를 하는데, 
마치 내가 출석하던  대구영낙교회에서 강신명 목사님 사모님을 통해서, 
숭실고등학교에 편입하여 공부를 시작해서 오늘에 이르게 되었지요.

 
이렇게 육이오는 민족의 일대 수난이었지만, 
따라서 내 인생의 전환점이 되기도 했지요.
만일 그런 환난의 날이 없었더라면 나는 아마 계속 시장  뒷골목에서
허드래일이나 하는 버림받은 한 인간이 되었을지도 모르는데, 
음식점 주인이 3개월 간 일 시키고 임금 한푼 지불하지 않고
몰래 피난을 떠났지만, 주님께서 배후에서 나의 길을 은밀히 인도하여 주셔서 
오늘에 이르게 하신 것이지요. 

그 뿐 아니라..
내가 14살 나던 해에 이북에서 아버지가 공산당 산하에서 시달리다가.
세상을 떠났을 때에,  나는 천애고아가 된 셈이지요.  
나를 낳아주신 어머니는 내가 5살 때 세상 떠났고, 
새어머니가 내 나이 6 살 때 들어오신 후,  
할머니 슬하에서 자라다가  할머니도 내 나일 10 살 때  세상을 떠났고,  
나보다 10살 위인 누님은 출가했고,  큰 형 둘째 형 모두 집을 떠났고,  
내 밑으로 이복 동생 둘은  아버지 세상 떠날 때, 4살,  3살이었고,  
새머머니 나이 그 때 34살 꽃 다운 나이에 아버지가 세상을 버렸으니..
나는 어쩔 수 없이 새어머니 친정으로 따라가서 1년을 외가집에서 머슴살이 하다가,  
1948년 5월 초에 사리원과 해주를 지나 어는 날 밤, 안내원의 인도로 38선을 넘어왔지요.

그 때 내 나이 15살.
월남해서 남대문 통에서 신문팔이도 해 봤고,
충무로 여러 다방에 다니면서 꽃도 팔아봤고,  
앞에서 말한 그 음식점에서 밥이나 얻어 먹고, 잠이나 자고,  
한 달에 얼마인지 기억도 없지만, 잘 해봐야 지금 돈으로 한 달에 한 2 백불이나  
300 불정도 아니었겠는가 생각을 하는데, 그것 마저도 한푼도 못받았으니, 참으로 
기가 막힐 일이었지만. 이 병신 같은 백호의 천성 때문인지, 아무 불평 원망 낙담 
없이 그 험한 육이오 동난의 와중에서
살아남아, 오늘 여기서 62주년을 맞이하니, 참으로 감개가 무량합니다.

아버지가 세상 떠날 때, 유언을 헸지요.
"너는 우리 가문에서 가장 불상한 자식이  되었구나,  
하지만 너는 예수만 잘 믿으라. 그리하면 그가 네 길을 인도하여 주실 것이니라
그리고 아버지 대를 이어 목사가 되어다오!"

아버지의 유언이 내 인생 길의 빛이 되었고, 내 발의 등이 되었지요.
실로 히브리 시인의 고백 처럼  "환난 당한 것이 나에게 유익"이 되었던 것입니다. 

만약 아버지가 그 때 그대로 살아서 목회를 하고 계셨더라면, 
당장은 남하할 기회도 없었고,  나는 잠간은 아버지 품에서 사랑을 받았겠지만, 
월남은 생각도 못했을 것입니다.  그저 거기 있다가 인민군으로 출전을 했을지 모르지요.

그러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것이 계기가 되어서, 외갓집 신세를 젔고,
외갓집이 반동분자의 가정으로 낙인이 찍힌 이유로 어느날 몰래 38선을 넘게 되었지요.

지나고 보니, 나의 겪은 환난의 날은 나에게 새로운 삶의 길로 인도하는 
관문이었다는 사실을 지금에 와서 더욱 절실히 깨닫게 됩니다.

오늘이 바로 육이오 동란 62주년을 맞이하는 날이네요. 

내가 이렇게 살아왔으니, 
이제 남은 세월, 
이렇게 살아남은 값을 
다 하고 죽어야 되겠는데...

그저 앞으로도 건강만 하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든지  
내가 도울수 있는 사람은 누구에게든지  
돕고 베풀다가 죽게 해 줍소사 하고 기도 합니다. 


샬롬!


2012년 6월 25일 아침
북미주 동남단 
플로리다 탬파에서 
白湖 池正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