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생활의 세 가지 덕목 (살전 1:2-10)
한국 사람들은 그 사람의 인격을 높여 말할 때에 "그 사람 참 덕이 많은 사람"이라 하고, 반대로 사람은 똑똑한데 인격이 부족한 사람을 가리킬 때에는 "사람은 똑똑 한데, 덕이 없어!"라고 말합니다. 덕이 무엇인가? 한자로 '덕 德'자를 '큰 덕'이라고 하는데, 크다는 뜻이지요. 덕있는 사람이란 소인(小人)이 아니라 대인(大人) 즉 군자(君子)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 사람은 인간 관계에 있어서 겸손하지요. 지위가 있어도 앞에 척척 나서지 않고, 남의 단점을 봐도 까발리지 않고, 뭘 잘 알아도 그저 모른체하고, 언짢은 일을 봐도 그 허물을 덮어주는 그런 사람을 덕있는 사람이라 하지요. 우리가 교회생활을 할때에도 이렇게 덕을 세우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교회생활을 하다 보면, 성경상으로는 죄가 아니지만 건덕상(建德上) 조심하고 삼가해야 할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주초 문제가 그렇고, 기도할 때에 방언으로 크게 기도하여 다른 사람에게 지장을 주는 일 등이겠지요 고린도 교회의 예를 들면, 방언하는 것이 덕을 세우지 못한다면 삼가하라 했고, 우상의 제물을 먹는 것이 죄는 아니지만 믿음이 약한 자를 위해서 바울 자신은 우상의 제물을 먹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이와 같이 교회생활에서 나의 행동이 남의 이목을 어지럽게 한다든가, 남의 구설수에 오르내린다면 그것은 덕을 세우지 못하는 일이 되고, 타인으로 하여금 죄를 짓게 하는 동기를 부여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교회생활에는 법보다는 덕을 세우는 일이 더욱 소중하다는 것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이상은 교회생활에서 덕을 세우기 위해서 취해야 할 소극적인 몇 가지 덕목을 말씀드렸고, 이제 본문을 통해서 교회 생활의 적극적인 몇 가지 덕목을 말 씀하고자 합니다. 첫째는 믿음의 역사(役事) 입니다(살전 1:2 ) 교회에서 무슨 일을 할 때에 믿음으로 하라는 것입니다. 사람의 지혜로 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믿음으로 하라는 것입니다. 특히 교회가 무슨 힘든 일을 결정할 때에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에 합당하고 그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라면, '좀 어렵겠지만 믿음으로 해보십시다. 주님께서 도와 주실 것입니다.' 이렇게 어려운 문제를 선히 해결해 나가는 사람을 덕있는 사람이라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사람을 우리는 가나안을 정복한 여호수아와 갈렙과 같은 사람이라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데살로니까 교회 성도들은 이렇게 모든 일을 믿음으로 했기 때문에 바울로부터 칭찬을 받았고, 마레도냐와 아가야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던 것입니다(살전 1:7). 둘째는 사랑의 수고입니다 교회의 일은 믿음으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수고가 뛰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그저 믿음으로 밀어 부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온교회가 사랑의 수고를 함께 나눠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사용하는 말 중에 '사랑'이라는 말 만큼 많이 쓰는 말도 없습니다. 그러나 말로는 사랑을 하면서, 수고가 따 르지 않는다면 그 믿음도 헛되고 사랑도 거짓이 될 것입니다(고전13:2).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갈6:2) 세째는 소망의 인내 입니다. 꿈을 가지고 앞을 향하여 전진하라. 현실에 만족하고 주저 앉으면 현상유지도 못하고 오히려 쇠잔합니다. 세상의 이치를 봐도 경쟁이 극심한 산업사회에서 새로운 작품을 내 놓지 못하면 그 기업은 스스로 문을 닫게 됩니다. 우리 앞에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이 약속되어 있어도 목적지를 향하여 전진하지 않으면 그 약속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가나안 정복이 불가능하다고 후퇴한 10 지파처럼 되지 말고, 믿고 힘쓰고 말씀에 순종하면 반듯이 가나안에 들어갈 수 있다는 여호수아와 갈렙같은 신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소망의 대상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서울의 어느 교회는 어마 어마한 돈을 드려서 세계에서 제일 가는 교회를 지으려고 하는데, 문제는 그 교회가 왜 그렇게 해야만 하는가. 그렇게 하는 목적이 무엇인가? 서울의 많은 대형교회들이 지난 날 크게 부흥도 했고, 나름대로 많은 일도 해 서 젊은 목회자들에게 선망의 대상이 되어왔지만, 지금은 어떻습니까? 세간에 큰 비난을 사고 있지 않습니까? 왜 그렇습니까? 초지일관하지 못하고, 그리스도를 향한 소망의 인내를 고수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미국에도 L.A. 근교의 로버트 슐러가 목회하던 수정교회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은행 빚을 갚지 못해서 도산하고 말았습니다. 교회의 목적이 무엇이냐? 누구를 위한 교회인가? 여기에 대한 대답이 분명해야 할 것입니다. 교회가 크던 작던 그것이 문제가 아니고. 문제는 그 교회가 과연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라"(마16:18)고 하신 주님의 그 교회인가가 문제입니다. 계시록 2장 3장에 나타난 소아시아의 7교회를 보세요, 큰교회 보다, 주님의 말씀 위에 서 있는 지극히 적고 가난한 서머나 교회와 빌라델비아 교회가 주님의 칭찬을 가장 많이 받지 않았습니까? 이제 다시 한번 물어봅니다. 무엇을 위한 믿음의 역사며, 무엇을 위한 사랑의 수고이며, 무엇을 바라보는 소망의 인내 입니까? 본문이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살전1:3)입니다. 매시야(그리스도) 왕국에 대한 소망입니다. 그 소망을 이루기 위해서 어떤 화난도 어떤 고난도 감수하는 인내입니다. 우리는 초대교회 성도들, 특히 신앙의 자유를 찾아 흩어진 디아스폴라에게는 메시야 왕국에 대한 꿈이 있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 메시야 왕국의 꿈이 무엇입니까? 사람이 사람답게 살고, 평화 공존하는 주님의 나라였습니다. 그 나라의 면모를 이사야는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가 열방 사이에 판단하시며 많은 백성을 판결하시리니 무리가 그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그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이 나라와 저 나라가 다시는 칼을 들고 서로 치지 아니하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지 아니하리라(사2:4)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거하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찐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사 11:6-8)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도 이와 같은 꿈과 소망을 가지고 더욱 신실한 신앙생활에 더욱 힘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의 말씀> 우리가 너희 무리를 인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도할 때에 너희를 말함은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쉬지 않고 기억함이니(살전1:2,3)
샬롬!
2012/6/10
주일아침
백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