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의 한이 서린 6월의 노래 '비목 碑木' - 6.25 전쟁 60주년을 맞으면서 함께 부르고 싶은 노래 -
 
비목 (碑木)

초연이 쓸고 간 깊은 계곡
깊은 계곡 양지녘에
비바람 긴 세월로 이름 모를
이름 모를 비목이여
먼고향 초동 친구 두고 온 하늘가
그리워 마디마디 이끼 되어 맺혔네

궁노루 산울림 댤빛타고
댤빛타고 흐르는 밤
홀로 선  적막감에 울어지친 
울어지친 비목이여
그 옛날 천진스런 추억은 애달퍼
서러움 알알이 돌이 되어 쌓였네

비목(碑木) : 한 명희 시 / 장 일남 곡 / 황 병덕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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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이하여 이 민족이 열강의 제물이 되어 6.25 동족상잔을 겪었던가.
세월은 흘러 어언 60년이 지냈건만, 아직 그날의 상처는 아물지 않고
민족 분단의 벽은 더욱 두터워가고만 있다.

우리는 6.25 전쟁 60주년을 맞이하여 동족상잔의 한을 노래한 비목의 작사자 한명희 
선생의 숨은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라 위해 목숨 바친 많은 영령들을 추모해야 
할것이다.

백호는 비목의 작시자 한명희 선생이 10여년전에 남겨놓은 비목의 배경을 아래에
옮겨본다.  

40년 전 나(한명희)의 군복무시절, 막사 주변 여기 저기서 뼈가 나오고 해골이 
나왔으며 땔감을 위해서 톱질을 하면 간간히 톱날이 망가지며 파편이 나왔다. 

그런가 하면 순찰삼아 돌아보는 계곡이며 능선에는 군데군데 썩어빠진 화이버며 
탄띠 조각이며 녹슬은 철모 등이 나뒹굴고 있었다.  실로 몇개 사단의 많은 젊음이 
죽어갔다는 기막힌 전투의 현장에서, 어느날 나는 개머리판은 거의 썩어가고 총열만 
생생한 카빈총 한 자루를 주워왔다.  그러고는 깨끗이 손질하여 옆에 두곤 곧잘 그 
주인공에 대해서 가없는 공상을 이어가기도 했다. 

전쟁 당시 M1 소총이 아닌 카빈의 주인공이면 물론 소대장에 계급은 소위렸다. 
그렇다면 영락없이 나같은 20대 한창 나이의 초급장교로 전사한 것이다. 
일체가 뜬 구름이요, 일체가 무상이다. 

처음 비목을 발표할 때는 가사의 생성과 그 사춘기적 무드의 치기가 부끄러워서 
"한일무"라는 가명을 썼었는데 여기 一無(일무)라는 이름은 바로 이때 응결된 
심상이었다. 이렇게 왕년의 격전지에서 젊은 비애를 앓아가던 어느날, 초가을의 
따스한 석양이 산록의 빠알간 단풍의 물결에 부서지고 찌르르르 산간의 정적이 
고막에 환청을 일으키던 어느 한적한 해질녘, 나는 어느 잡초 우거진 산모퉁이를 
돌아 양지바른 산모퉁이를 지나며 문득 흙에 깔린 돌무더기 하나를 만날 수 있었다. 

필경 사람의 손길이 간 듯한 흔적으로보나 푸르 칙칙한 이끼로 세월의 녹이 
쌓이고 팻말인 듯 나뒹구는 썩은 나무등걸 등으로 보아 그것은 결코 예사로운 
돌들이 아니었다. 

그렇다. 그것은 결코 절로 쌓인 돌이 아니라 뜨거운 전우애가 감싸준 무명용사의 
유택이었음에 틀림없다. 어쩌면 그 카빈총의 주인공, 자랑스런 육군 소위의 계급장이 
번쩍이던 그 꿈 많던 젊은 장교가 묻혔을까?


제대 후에도 나는 2년 가까이 정들었던 그 능선,
그 계곡의 정감, 그곳의 환영이 걷힐 날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날 내가 TBC 음악부 PD로 근무하면서 
우리 가곡에 의도적으로 관심을 쏟던 의분의 시절,
그때 나는 방송일로 자주 만나는 작곡가 
장일남으로 부터 신작가곡을 위한 가사 몇편을 
의뢰받았다. 바로 그때 제일 먼저 내 머리 속에 
스치고 간 영상이 다름 아닌 그 첩첩산골의 이끼 
덮인 돌무덤과 그 옆을 지켜 섰던 새하얀 
산목련이었다. 

나는 이내 화약 냄새가 쓸고 간 그 깊은 계곡 
양지녘의 이름모를 돌무덤을 포연에 전사한 
무명용사로, 그리고 비바람 긴세월 동안 한결같이 그 무덤가를 지켜주고 있는 
그 새하얀 산목련을 주인공따라 순절한 연인으로 상정하고 사실적인 어휘들을 
문맥대로 엮어갔다. 

1절가사.
초연이 쓸고간 깊은 계곡 양지녘에 
비바람 긴세월로 이름모를 이름모를 비목이여 
먼 고향 초동친구 두고온 하늘가 
그리워 마디마디 이끼되어 맺혔네

궁노루, 즉 사향노루 한마리를 대원들과 함께 순찰길에서 잡아왔다.
아기염소만한 궁노루 한마리의 향기가 내무반안을 가득채웠다.
그날밤 부터 홀로 남은 암짝이 울어 대기 시작했다.
갸녀린 체구에 캥캥데며 며칠째 밤새 울어대는데, 
살상의 잔인함과 회한에 나는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달빛이 계곡능선을 흐르는 밤에
나도 울고, 짝잃은 암컷 궁노루도 울고 
나중에는 온 산천이 오열하는 듯 하였다.

2절 가사
궁노루 산울림 달빛타고 흐르는 밤 
홀로선 적막감에 울어지친 울어지친 비목이여 
그 옛날 천진스런 추억은 애달퍼
서러움 알알이 돌이되어 쌓였네 

이렇게 해서 비목은 탄생되고 널리 회자되기에 이르렀다. 
오묘한 조화인양 유독 그곳 격전지에 널리 자생하여 고적한 무덤가를 지켜주던 
그 소복한 연인 산목련의 사연은 잊혀진 채 용사의 무덤을 그려본 비목만은 
그야말로 공전의 히트를 한 셈이며 지금도 꾸준히 불려지고 있다. 

비목에 얽힌 일화도 한두 가지가 아닌데, 가사의 첫 단어어인 '초연'은 
화약연기를 뜻하는 초연(硝煙)인데, '초연하다' 즉 관심을 두지 않는다는 
오불관언의 뜻으로 해석하는 경우도 있었다. 또 한때는 비목(碑木)이라는 말 
자체가 사전에 없는 말이고 해서 패목(牌木)의 잘못일 것이라는 어느 
국어학자의 토막글도 있었고, 비목을 노래하던 원로급 소프라노가
'궁노루산'이 어디 있느냐고 묻기도 한 일이 있었다. 궁노루에 대해서 
언급하면, 비무장지대 인근은 그야말로 날짐승,길짐승의 낙원이었다. 

6월이면 반도의 산하는 비목의 물결로 여울질 것이다. 
그러나 군에서 휴가나와 명동을 걸어보며 눈물짓던 그 턱없는 순수함을 모르는 
영악한 이웃, 숱한 젊음의 희생위에 호사를 누리면서 순전히 자기탓으로 
돌려대는 한심스런 이웃 양반, 이들의 입장에서는 비목을 부르지 말아다오.
 시퍼런 비수는커녕 어이없는 우격다짐 말 한마디에도 소신마저 못펴보는 
무기력한 인텔리겐차, 말로만 정의, 양심, 법을 되뇌이는 가증스런 말팔이꾼들, 
더더욱 그같은 입장에서는 비목을 부르지 말아 다오. 
 풀벌레 울어예는 외로운 골짜기의 이름없는 비목의 서러움을 모르는 사람, 고향땅
파도소리가 서러워 차라리 전사한 낭군의 무덤가에 외로운 망부석이 된 백목련의 
통한을 외면하는 사람, 짙푸른 6월의 산하에 비통이 흐르고 아직도 전장의 
폐허 속에서 젊음을 불사른 한많은 백골들이 긴밤을 오열하고 있다는 엄연한 사실을 
망각하고 있는 사람들, 겉으로는 호국영령을 외쳐대면서도 속으로는 사리사욕에만
눈이 먼 가련한 사람, 아니 숱한 전장의 고혼들이 지켜낸 착하디 착한 이웃들을 
사복처럼 학대하는 모질디 모진 사람, 숱한 젊음의 희생아닌 것이 없는 순연한 
청춘들의 부토위에 살면서도 아직껏 호국의 영령앞에 민주요, 정의요, 평화의 깃발
한번 바쳐보지 못한 저주받을 못난 이웃들이여, 제발 그대만은 비목을 부르지 
말아다오. 죽은 자만 억울하다고 포연에 휩싸여간 젊은 영령들이 진노하기전에! 

이와 같이 한명희 선생이 남긴 비목의 메시지가 무엇인가?
그것은 외적도 문제려니와, 더욱 큰 문제는 외적이 아니라 내적이라는 사실이다.
부패한 내 자신이다. 자기 한 몸의 안일을 위해서 사회의 정의와 인권을 
외면한 개인주의와 안일주의가 문제이라는 사실이다.

"Freedom is not Free! 
자유는 거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이 말은 워싱턴에 있는 한국전 참전기념공원 기념비에 새겨진 글이다.

오늘 우리가 이만큼 자유를 누리고 살수 있는 것은 결코 거저 된 것이 아니다.
6.25전쟁에서 미군의 사망자 수가  4만명이요, 부상자 수가 9만명이다.
한국군은 14만명이 사망했고, 45만명이 부상을 입었다.
오늘의 한국의 자유와 번영이 그저 주어진 것이 아니다.
이들의 희생이 밑거름이 되었다는 것을 오늘의 젊은 세대들은 결코 잊어서 안된다.
그 중에도 이름 모를 비목의 주인공들이 얼마나 많은가.

우리는  한국전에 참전했다가 전사한 미국인 윌리엄 해밀턴 쇼의 고귀한 정신과 
희생을 가슴 깊이 간직해야 할 것이다.

쇼는 1922년 평양에서 선교사로 활동했던 윌리엄 얼 쇼의 외아들로 태어나 한국 
이름도 있었고, 한국말도 잘 하고 고등학교까지 한국에서 마쳤다.
그후 그는 미국으로 건너가 대학을 졸업하고 1943년 미국 해군 소위로 임관하였으며
제2차세계대전에 참전했고, 1947년에는 다시 한국으로 나와 미군정 소속 해군사관
학교에서 1년간 교관으로 근무한 후 전역하여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서 하바드 
대학에서 학위 과정을 밟고 있었다.  그런데 쇼는 자기가 태어난 나라에 전쟁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그는 자원 입대하여 한국전에 참전하기로 결심했다. 
참으로 얼마나 고귀한 선택인가. 그가 한국전에 참전할 결심을 하고 부모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남겼다.
"사랑하는 부모님,  지금 한국국민이 전쟁에서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이들을 먼저 돕지 않고 전쟁이 끝나고 한국에 평화가 왔을 때, 한국에 선교사로 
나간다는 것은 내 양심이 도저히 허락하지 않습니다. 부모님 저는 한국전쟁에 
참전하겠습니다." 그는 자원하여 한국전에 참전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1950년 9월 22일, 녹번리 전투에서 28세의 꽃다운 나이로 전사했다.
지난 6월 22일(화) 오후 2시에는 그의 고귀한 정신을 기리기 위해서 녹번리 
평화공원에서 그의 동산 제막식이 있었다고 한다.


한 네티즌은 6.25전쟁 60주년을 맞이하여 이렇게 절규한다. 

전쟁이 없어야 하고 평화와 자유가 보장되는 것이 우리의 소망이다.
그러나 우리 앞에 닥칠지도 모를 전쟁의 두려움을 경제발전을 저해한다느니 
국민 여론이 악화된다느니 하는 일부사회 현상은 우리민족과 국가의 장래는 파멸의
나락으로 떨어지게 하는 요인이 될 것이다. 자유와 평화는 용서와 사랑과 포용만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고 희생과 고통이 수반되는 싸워서 쟁취하는 결과이다. 
희생과 고통을 이겨내고 자유의 가치를 소중이 가꾸고 지킬 때 우리 후손은 행복할
것이다. 6.25를 잊지말자. 올바르게 가르치고 영원히 기억하자!



<오늘의 말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12:24)


샬롬!
2010년 6월 27일
주일아침
백호